호기심·세상·좌절감·관찰·기억·연결·위안…. ‘2024 올해의 저자’들에게 ‘나를 쓰게 하는 힘은 다’라는 문장을 주고 빈칸을 채워달라 했더니 나온 단어들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글쓰기의 동력이 됐다. 전국 동네 서점 운영자 20명, 서점 MD, 본지 북 칼럼 필진, 문화부 기자 등이 올해 책을 낸 국내 저자 3명씩을 추천하고, Books팀이 최종 선정했다. 문인, 학자 등 전통적인 글쟁이는 물론이고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70대 주부, 영국인 저술가 등 다양한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이 포함됐다.

그래픽=이진영

당대 문인의 일상 통해 고려시대 생활사 복원 | 강민경 제주박물관 학예사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

푸른역사 | 388쪽 | 2만원

교과서에서 이규보란 인물은 ‘고려 시대에 동명왕편을 쓴 사람’ 정도로 건조하게 ‘암기’됐다. 이 책에서 이규보는 물론, 그 주변 인물과 같은 시대 고려 사람들은 책 밖으로 걸어나와 살아 숨쉬며 왁자지껄 떠든다. 허구가 아니라 기록을 꼼꼼하게 분석한 결과다. 이규보는 튀어나오는 배를 보며 한숨 짓던 ‘동네 아저씨’이자 ‘술고래’였고, 같은 시대인 13세기 초 고려 사람들은 생선회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인 저자 강민경(36)은 “흥미롭고 낯선 것 앞에서 생기는 ‘호기심’이 글쓰기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이규보란 인물이 어느 날 무슨 일을 했는지 조사하다 보면, 그 일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졌는지,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과는 어떻게 같고 다른지, 견줘 볼 외국 사례가 있는지,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것. “그러다 보면 뜻밖의 장소에서 고구마 캐듯 쑥쑥 얘깃거리를 얻기도 합니다.” 그걸 엮고 다듬다 보니 어느새 훌륭한 생활사 책 한 권이 돼 있었다.

5만부 팔린 첫 소설집… 동인문학상 등 2관왕 | 김기태 소설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학동네|336쪽|1만6800원

등단 3년 차인 소설가 김기태(39)는 올해 뜨겁게 주목받은 신인이다. 그의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장안의 화제였다. 술술 읽히는 세태소설 같지만, 묵직한 한 방이 있다. 신동엽문학상과 동인문학상 2관왕을 달성했다. “신인이지만, 신인 같지 않은 작가”(권세라 바름책방 대표)라는 평 등 ‘올해의 저자’ 설문에서도 여러 번 언급됐다. 지난 5월 출간돼 쇄를 거듭해 찍었다. 12월 말 기준 약 5만3000부가 팔렸다.

김기태의 쓰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소설가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에는 학교도 병원도 백화점도 놀이공원도 있다”면서도 “아무리 넓고 화려한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면 세상은 감옥”이라고 했다.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는 “나는 사형보다 종신형을 택했고, 남은 형기가 더 견딜 만하길 바란다”며 “내게 소설 쓰기란 수감 중 유희, 또는 살아본 적 없는 ‘바깥’을 기억해내는 일”이라고 했다.

피눈물 흘리며 적어간 ‘피해자 권리’ 제안서 | 김진주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얼룩소|320쪽|1만8000원

대한민국에서 범죄 피해자는 두 번 운다. 범죄를 당했을 때, 그리고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가 아니라며 소외될 때. 피고인 방어권 덕에 가해자는 피해자가 제출한 각종 소송 관련 자료를 손쉽게 볼 수 있는 반면, 피해자에겐 열람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것이 피해자들을 분통케 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28)씨가 쓴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는 피눈물 흘리며 적어간 피해자 권리에 대한 제안서다. 그는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법원이 반성, 인정, 심신미약 등을 이유로 감형해주는 관행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을 쓰도록 한 동력은 ‘좌절감’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범죄 피해자 입장에서 ‘후진국’이다. 나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평생 피해자 권리가 여기 머무를 것 같아서, 다른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하영남 서촌 그 책방 대표는 “이런 사회를 만든 어른인 내가 부끄럽다”며 올해의 저자로 추천했다.

5년간 의친왕 추적한 韓특파원 출신 영국인 | 다니엘 튜더 前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마지막 왕국

우진하 옮김ㅣ김영사ㅣ616쪽ㅣ2만2000원

다니엘 튜더(42)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아는 영국인’으로 통한다. 2010년 영국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 기자로 근무할 당시 한국 특파원으로 파견되면서 ‘한국의 정’에 매료돼 정착했다고 한다. 북한 문제와 한국 대통령 선거 등 국내의 다양한 현안을 다루는 기사를 쓰고,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조선자본주의공화국’ 등 한반도 관련 책을 계속 내며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줬다.

최근 낸 장편소설 ‘마지막 왕국’은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의 일생을 다뤘다.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 “마치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자 출신인 그의 오래된 습관이자 평생 갖고 갈 주특기, ‘관찰’ 덕이다. 5년간 의친왕과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발자취를 좇았고, 관련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요즘 ‘나’에 대한 에세이가 많더라고요. 근데 저는 ‘남’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아요. 타인과 나누는 소통, 영감, 감동에서부터 글쓰기가 시작되죠.”

기억이란 보물 창고서 손때 묻은 사랑을 찾다 | 안희연 시인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ㅣ168쪽ㅣ1만2000원

시인 안희연(38)이 올해 출간한 ‘당근밭 걷기’는 다정하게 곁에 있는 이의 시선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표제작 속 화자는 땅에 당근을 심고, 두더지를 들이고서 이들과 눈을 마주친다.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당근과 두더지는 나를 있게 하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김주은 책방심다 대표는 “평범한 풍경 속에서 발견한 삶의 비밀을 섬세한 언어로 표현하며 일상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전한다”고 했다.

안희연은 “나를 쓰게 하는 것은 ‘기억’”이라고 했다. “저는 기억이라는 보물 창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보물 창고엔 유년의 장면들이, 손때 묻은 사랑의 사물들이, 나를 나이게끔 한 사람들이 자리해 있습니다.” 시인은 “시는 나라는 주머니 안에 어지러이 흩뿌려진 기억들이 백지 위에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태어난다”며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워나간다”고 했다. “시인으로서의 저는 기억과 사랑을 잇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조선소 출신 학자가 본 산업도시 울산의 미래 |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울산 디스토피아,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부키|432쪽|1만9800원

양승훈(42)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조선소에서 5년간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산업도시, 제조업 혁신과 엔지니어, 청년 일자리 등을 연구하는 ‘현장형 학자’다. 2019년 첫 책 거제와 조선 산업에 대해 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냈다. 이번 책에선 제조업 도시 울산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양승훈을 “수도권에 편중된 경제 초점을 지방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든 연구자”라 평했다.

젠더 문제 등 여러 렌즈를 통해 산업도시 울산의 가능성을 묻는다. 젊은 고학력 여성들이 울산을 떠나는 이유로 ‘산업 가부장제’를 꼽는다. 조선·자동차·석유화학이라는 울산의 3대 산업은 여성을 채용 단계에서 배제한다.

‘무엇이 당신을 쓰게 하는가’ 물으니 ‘연결’에 대한 욕망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살 방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다. 그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전달해 사람들 간 인식의 세계가 섬처럼 분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가 글 쓸 때 품는 문제의식이다.”

70대 할머니의 토닥임… 출간 넉 달 만에 4만부 | 이옥선 주부

즐거운 어른

이야기장수ㅣ248쪽ㅣ1만6800원

반세기를 넘게 전업주부로 살았던 이옥선(76)씨는 2021년 4월 남편과 사별한 후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절대 제사를 지낼 생각들 말아라. 이제 우리 집안은 제사가 없는 집안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 1948년 태어나 오랜 세월 가부장제를 견뎌온 여성이 불합리한 관습에 대해 일갈하는 순간이었다. 떠난 망자(亡者)를 위해 남은 이들이 매번 고생하지 말고 현시대에 맞게 살자는 것. “저는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에 왔으면 그 법을 따라야지요.”

위트 넘치는 그의 에세이 ‘즐거운 어른’은 ‘선진국’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위안’이기도 하다. 비즈니스 칼럼니스트 박소령은 “산뜻하게 사는 할머니가 젊은 세대에게 주는 즐거운 충격이 책 속에 가득하다”고 했다. 지난 8월 출간 이후 약 4만부 팔렸다. 40대 여성이 가장 많이 읽었고, 50대 여성 구매자 비율도 높다. “비혼이면 어떻고, 좀 못살면 어때. 너무 다그치지 말어. 있는 그대로가 ‘갓생’이야.”

[누가 추천했나]

동네 책방 운영자 건우네책방 박희문, 글한스푼 김민희, 꿈틀책방 이숙희, 다즐링북스 홍지영, 마그앤그래 이소영, 바름책방 권세라, 버찌책방 조예은, 보배책방 정보배, 빈칸놀이터 이세연, 빛나는 친구들 공인애, 서촌그책방 하영남, 속초 동아서점 김영건,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 유희경, 완벽한 날들 최세연, 잘 익은 언어들 이지선, 주책공사 이성갑, 주책방 주선경, 쩜오책방 이정은, 책방 소리소문 정도선, 책방심다 김주은

서점MD 구환회·김정미·이주호·한재국·한지수(교보문고), 김경영·김효선·임이지·박동명(알라딘), 김유리·백정민·손민규·이주은(예스24)

북칼럼 필진 박소령 비즈니스 칼럼니스트, 신승한 광운대 교수, 우석훈 경제학자, 이수은 독서가, 장강명 소설가

문화부 기자 곽아람, 김광진, 유석재, 이태훈, 황지윤 (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