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렘 입숨의 책

로렘 입숨의 책

구병모 지음 | 안온북스 | 256쪽 | 1만5000원

“읽었을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하여 아무 글자나 얹어놓은 것은 아니다.”

단편 ‘동사를 가질 권리’는 ‘로렘 입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로렘 입숨은 인쇄물의 편집 단계에서 레이아웃 예시를 보여주기 위해 무작위로 적은 텍스트 더미. 작가인 화자는 그런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창문 너머의 비를 보며 든 생각 때문이다. 왜 비는 내리기만 할까. 올라가는 비는 없을까. 그는 주어와 동사의 호응 관계를 무시한 문장을 쓰다 깨닫는다. 그 무엇도 쓰지 않음이 자신이 꿈꾸던 글쓰기라는 것을. 태어나지 않음이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말이다.

사실 모든 글쓰기는 로렘 입숨일지도 모른다. 인물, 서사와 같은 글쓰기 문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편 ‘예술은 닫힌 문’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의 문법을 깨뜨린다.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가한 이들은 탈락하고나서야, 실제로 목숨이 걸린 오디션임을 알게 된다. 참가자들은 탈락하면 무대 밑 깊은 땅으로 떨어져 죽는다. 첫 번째 생존자는 마치 오늘 처음 악기를 잡아본 것 같은 이들이다. 청중의 웃음을 터뜨린 덕에 살아남은 것. 탈락자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환청을 들으며 죽는다.

100쇄를 넘긴 베스트셀러 ‘위저드 베이커리’(2009)의 저자이자 14년 동안 장르문학, 청소년문학 등의 경계를 넘나든 구병모의 소설집. 원고지 50장 분량의 단편 열셋을 묶었다. 사회 제도, 예술, 신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그리나, 분량이 짧아 쉽게 읽힌다. “콘텐츠의 홍수 한복판에 있는 내 모습을, 지속적으로 낯설게 여겨야 한다고 믿는다”는 그의 말처럼 각 단편을 통해 우리의 삶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