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3년째 계속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정세는 어지러우며, 치솟는 금리와 인플레이션에 경제는 어려운 데다, 청춘들이 희생된 참극까지 겹친 한 해였다. 이런 상황 속에도 책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가 유념해야 할 가치를 상기시켰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상실에 대한 위로, 부모가 된다는 것과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 조선일보 Books의 2022년 ‘올해의 책’ 키워드는 이렇게 요약된다. ‘올해의 책’은 올 한 해 Books와 문화부 지면이 주목했던 책 중에서 사회의 큰 흐름을 반영해 선정했다. 올해는 예년과는 달리 인문·사회, 과학, 소설, 에세이, 어린이책으로 세분화해 정교함을 더했다.
‘정상은 없다’는 드라마 ‘우영우’ 열풍으로 상기된 자폐인에 대한 관심을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감으로 확장시켰다. 친구를 잃은 어린이들이 이별을 껴안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인 ‘기소영의 친구들’은 이태원 참사로 상실의 아픔을 겪은 우리를 어루만진다. 부모에 대한 이해와 그리움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가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 갓 아버지가 된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아들에게 주는 책 ‘인생의 역사’는 부모됨의 벅참을 내포한다.
본지 문화부 기자 12명과 출판·문학 평론가 6명, 출판계 흐름에 정통한 서점 MD 15명 등 33명이 3권씩 추천하고, Books팀이 최종 선정했다.
◊자폐는 아직도 낙인인가… 정상·비정상 경계를 묻다
정상은 없다
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정해영 옮김|메멘토|600쪽|3만3000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를 끌며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한 해였다. 자폐인 딸을 둔 미국 인류학자가 쓴 이 책은 자폐증,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조현병 등을 겪는 이들과 그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낙인’을 주제로 한다.
아내가 한국계인 저자는 2006~2011년 한국서 자폐증 역학조사를 했다. “한국 부모들은 자폐가 집안 내력이라며 자폐아를 집안의 ‘어두운 그림자’로 본다.” 그는 “인류학의 목표는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이라며 “자폐인이 덜 낯설어질수록 그들이 살아가기 쉽도록 세상이 바뀐다”고 말한다.
“정신질환·장애에 대한 낙인찍기가 정상성이라는 허구에 어떻게 바탕을 두는지 규명하는 책”이라는 추천사가 있었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美中 자본충돌이 핵심
제국의 충돌
훙호펑 지음 |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24쪽 | 1만6000원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이 대만을 방문하며 미·중 ‘신냉전’이 더욱 격렬해진 해였다. 많은 이가 미·중 갈등을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이해하지만,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양국 기업의 자본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체제에서 양국은 ‘차이메리카’라고 불릴 정도로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중국이 자국 기업을 노골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양국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됐다는 것. 저자는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낮다고 평하면서도, 자본을 둘러싼 경쟁은 격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표정훈 출판평론가가 “미·중 갈등이 자본 경쟁이 낳은 지정학적 충돌임을 설득력 있게 설파했다”고 평가한 책. 4050 남성이 가장 많이 구매했다.
◊구매자 절반이 2030 여성, 과학으로 삶을 탐구하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300쪽 | 1만7000원
독자들의 심리적 장벽이 높은 과학 도서로서는 이례적이다. 약 15만부가 팔리며 온라인 서점 알라딘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19세기, 당시까지 알려진 어종(魚種) 중 5분의 1을 발견한 한 과학자의 삶을 통해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과학 에세이. 수집했던 어류 표본과 이름표가 지진으로 뒤섞이며 그가 이름 붙였던 물고기 수천 마리는 다시 ‘미지의 존재’로 되돌아갔다. 미국의 과학 전문 기자인 저자는 “자연의 분류 단계는 인간의 발명품일 뿐, 자연엔 경계선이 없다”며 우리가 믿어왔던 여러 ‘삶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모으고 나누고 질서 잡는 행위에 깃든 폭력과 위험, 편견과 부조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구매자 절반가량(45%)이 2030 여성이다.
◊지구 온난화 막으려다 파란 하늘을 잃을 수도
화이트스카이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 김보윤 옮김 | 쌤앤파커스 | 296쪽 | 1만8000원
기후변화를 피부로 느낀 한 해였다. 한반도의 연평균 기온은 계속 오르고, 올해 여름 수도권 지역엔 115년 만의 기록적 폭우가 내렸다. 이제 기후변화는 모두가 인정하는 인류의 위기가 됐다.
문제는, 인류의 기술 진보가 기후 위기마저 제어할 수 있다는 일부 기술론자의 맹신이다.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저자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과학기술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구공학 분야에선 성층권에 흰색 ‘빛 반사 입자’를 뿌려 태양열을 덜 받게 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접근이 오존층을 파괴하고 하늘을 흰색으로 만들 수 있다며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기술의 한계를 드러낸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기후 위기에 대한 섬뜩한 경고”라고 평했다. 30대와 40대가 주로 구매했다.
◊인생의 기술이 필요할 때 김연수의 소설을 집어라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76쪽 | 1만4000원
‘평범한 미래’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 한 해였다. 폭우, 이태원 참사 등 예기치 못한 비극이 많았다. 표제작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을 그린다. 작품 속 연인은 삶의 비극과 황홀함을 모두 경험하고 난 다음에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가장 좋은 게 나중에 온다”고 상상하며 매 순간의 고통을 버텨낸 결과다.
일상 속 빛나는 조각들로 위안을 건네는 작가 김연수가 9년 만에 낸 단편소설집.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인생의 기술이 필요할 때, 우리가 왜 돌고 돌아 소설을 찾게 되는지에 대한 해답 같은 책”이라며 추천했다. 소설은 말한다. 희망은 비극에서 피어난다고. 우리는 모두 내년이 더 좋아지기를 바라지만, 각자 처한 현재를 제대로 돌이켜본 다음에야 그런 미래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이다.
◊”아버지 이해하게 됐다” 40~50대가 주로 구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68쪽 | 1만5000원
전직(前職) 빨치산 아버지의 죽음이 올해 수많은 독자들 가슴속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소설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굴곡진 현대사를 살아온 수많은 얼굴들을 보여준다. 지난 9월 출간돼 약 17만부 판매됐다.
‘빨치산’이라는 소재가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유머다. 소설은 이데올로기, 죽음 등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평생을 정색하고 살았던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는 시작부터 그렇다. 또, 자전적 소설이 주는 공감의 힘이 컸다. 작가가 빨치산 아버지의 삶을 이해했듯, 책을 읽고 각자 아버지를 알게 됐다는 평이 많다. 주로 40~50대가 샀다.
김효선 알라딘 한국소설 MD는 “빨치산 아버지라는 특수한 아버지에게서 각자의 아버지의 보편적인 남루함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라며 권했다.
◊엄마의 맛을 기억하며… 한국계 美작가의 사모곡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정혜윤 옮김|문학동네|408쪽|1만6000원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이 첫 문장이 올해 수많은 독자의 눈시울을 적셨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의 애끊는 사모곡. H마트는 미국의 한인 식품점 체인. 저자는 반찬 코너를 지나며 엄마의 계란 장조림과 동치미 맛, 냉동 식품 코너를 스치며 엄마가 빚은 만두, 건조 식품 코너에선 엄마가 식탁에 올리던 김 맛을 떠올리며 훌쩍인다.
엄마의 요리로 엄마를 기억하는 일이 만국 공통이기 때문일까. 미국에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천하기도 했다. 김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를 떠내보낸 후 상처를 스스로 회복해 가는 이야기”라며 권했다. 주 구매자는 40대 여성이다.
◊자식에게 건네는 詩 25편, “삶은 시처럼 쌓여간단다”
인생의 역사
신형철 지음 | 난다 | 328쪽 | 1만8000원
시를 사랑하는 문학평론가가 전하는 인생 이야기. 그에게 시는 “아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다. 스물다섯 편의 시를 권하면서, 그 안에 담긴 인생을 글로 기록했다. 지난 10월 출간된 이후, 두 달도 되지 않아 약 3만2000부가 팔렸다.
책은 최근 아버지가 된 저자가 아이에게 건네는 선물이기도 하다. 책을 열고 닫는 키워드 역시 ‘조심’과 ‘돌봄’. 시와 인생을 세심히 살피겠다는 저자의 자세는 올해를 마무리하는 독자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줬다. “5천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는다”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 “시 그리고 시 평론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해주는 책”이라는 추천이 있었다.
◊떨어진 달 조각 돌려주려 밤하늘 널뛰는 토끼 도령
달토끼
최영아 글·그림|북극곰|44쪽|1만5000원
동글동글한 토끼가 하늘의 보름달과 인사하는 첫 장면부터 미소를 짓게 된다. 우연히 정원 연못에 떨어진 달의 조각. 토끼는 이 조각을 돌려주려 널뛰기와 그네, 줄타기 같은 우리 옛 놀이로 조금씩 달님에게 다가간다. 하늘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텍스트 없이 그림만 있는데도 소근소근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토끼와 달님의 마음이 오갈 땐 만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생동감 넘친다. 구름과 나무, 연꽃과 병풍 등 배경엔 우리 전통 문양과 색채가 은근히 배어나온다.
안데르센상 수상 작가 이수지가 개척한 ‘글 없는 그림책’의 상상력,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 수상 작가 백희나가 담는 한국적인 것의 아름다움은 우리 작가들에게 주어진 경쟁력이자 자산. 신인 작가는 5년을 준비한 첫 창작 그림책에서 선배들의 성취 위에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 만만찮은 내공을 선보였다.
◊잊히길 기다리지 않을래, 빛나던 너를 기억할 거야
기소영의 친구들
정은주 지음| 해랑 그림|사계절|152쪽|1만2000원
같은 반 친구 기소영을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보내는 아이는 혼란스럽다. 엄마는 ‘내일 아침에 국화꽃을 사 가라’고 한 뒤 입을 꾹 다문다. 선생님들은 ‘동요하지 말라’며 장례식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책상 위의 꽃이 시들길 기다리면 다 잊히는 걸까.
처음 마주한 상실에 혹시 마음 다칠까 걱정만 앞서는 어른들에게 기대는 대신, 아이들은 스스로 애도의 방법을 찾아나간다. 함께했던 빛나는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추억 속 모습 그대로 보내주는 법을 터득해 간다. 그 여정의 끝에 훌쩍 자란 아이들이 있다. 올해 제2회 사계절어린이문학상 수상작. 한미화 어린이책 평론가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임이지 어린이책 MD가 “이태원 참사를 지켜본 어린이들에게 죽음과 애도에 관해 들려주는 동화”라는 평과 함께 추천했다.
*올해의 책, 누가 선정했나 (가나다순)
문화부 기자 곽아람, 김성현, 박돈규, 신동흔, 어수웅, 유석재, 윤상진, 윤수정, 이영관, 이태훈, 정상혁, 최보윤
출판전문가 김태선∙박혜진 문학평론가,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표정훈∙한미화 출판평론가
서점 MD 구환회·김다영·김수현·김지은·김현정·위다혜(교보문고), 권벼리·김경영·김효선·임이지(알라딘), 박은영·박형욱·손민규·안현재·이나영(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