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에서

이국에서

이승우 장편소설 | 은행나무 | 356쪽 | 1만6000원

한 광역시 시장이 건설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스캔들이 터진다. 다음 시장 선거까지 남은 기간은 6개월. 재선에 성공하면 대권 가도를 달리겠지만, 스캔들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시장의 측근 ‘황선호’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 죄를 뒤집어쓰고 잠적하자는 제안을 한다. 자신이 선거 캠프의 비주류이자 ‘외부인’라는 걸 모른 채. 시장은 황선호에게 그 역할을 직접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휴가라고 생각해. 그동안 쉬지 않고 일했잖아. 보너스를 받은 거라고 생각해.”

황선호에게 선택지는 둘뿐이다. 제안을 받아들이든가, 캠프를 떠나든가. 묘책을 떠올린 당사자이자, 독신이기에 제안을 거절할 명분도 없다. 결국 그는 비행기로 26시간 거리의 ‘보보민주공화국’으로 향하기로 선택한다. 캠프 측이 제시한 국가는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니 잠적하기에 좋다는 게 선택 이유지만, 실상은 운명과 같은 끌림이 있었다. 그곳에서 황선호는 위장 신분을 얻어 살아간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대산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 이승우가 쓴 ‘이국에서’(은행나무)의 도입부다. 등단 42년 차인 작가는 장편소설 11권, 단편집 11권 등 왕성하게 활동 중인 현역. 이승우가 3년 만에 낸 이번 장편소설은 현실 정치의 뒷이야기 같은 내용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의 관심은 정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개인의 내면을 조명해 한 개인의 삶이 집단의 역사와 어떻게 이어지고 갈라지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떠난 곳에서도 삶은 자유롭지 못하다. 보보민주공화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독재로 정세가 불안정하다. 군부는 내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인’을 추방하기로 한다. 황선에게는 돌아갈 본국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우연히 외부인들의 커뮤니티를 알게 된다. 자신처럼 살던 곳을 떠나 보보민주공화국에 왔지만, 추방돼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승우는 “연재를 마친 후 소설을 고치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며 “어디에나 있는 다른 나라, 그리고 한 사람 안의 외부인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백다흠씨 제공

“모두들 사연이 있어요. 대를 이어 살아온 자기 나라를 그냥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살 수 없어 떠났지만 이 친구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돌아가려면 그곳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야겠지요. 그래서 떠도는 거예요.”

변화는 황선호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성찰이 아니라 모방과 관성”에 의해 살아왔고, 잠적하라는 시장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그였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 남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어머니의 생전 조언도 당시의 그에겐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국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황선호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한다. 돌아갈 곳이 없어 수십 년에 걸쳐 숨어 지내면서도, 자신의 삶의 의지를 다지는 사람들과 교류한다. 황선호는 그들이 살아온 치열한 삶의 기록을 되짚어보며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점차 외부인이면서 보보민주공화국의 내부에 스며든다.

황선호 아버지의 과거를 되짚는 과정이 서사의 한 축을 이룬다. 그가 보보공화국에서 만나는 인물, 풍경들은 사실 어머니와 낯선 남자와의 편지에서 본 것들이었다. 외부인이 추방당했던 불행한 역사가 황선호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어머니의 조언이 그제서야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황선호는 뒤늦게 자신을 찾아 온 시장 측 인물들에게 말한다. “나는 그 도시에 없는 사람이에요. … 나는 앞으로도 여기 있는 사람이기를 원해요.”

소설은 본국에서도, 이국에서도 외부인일 수밖에 없는 인물을 통해 공동체의 불행과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그린다. 그러나 현실의 불행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를 꿈꾸는 이들을 통해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작가는 예정된 불행을 피할 수는 없으나 외부와 내부라는 구분을 넘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