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충돌

훙호펑 지음 |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24쪽 | 1만6000원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제국’의 대결 상황은 20세기 초 기존 제국인 영국과 신흥 제국인 독일이 대결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은 미국을 추월해 ‘제1 제국’의 위치에 오르기는 어렵다.”

홍콩 출신으로 미국 존스홉킨스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 훙호펑(孔誥烽)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 간 경쟁’에 있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전에 이미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해 기축 통화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으나 여전히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참여 국가들에 돈을 빌려줄 때 달러로 거래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칩 생산에서도 중국은 미국이나 그 동맹국에 의존하는 현실이다.

이 책(원제 ‘Clash of Empires’)은 그렇게 ‘자본의 논리’에 따라 밀월과 공존에서 경쟁과 충돌로 뒤바뀐 미·중 관계의 본질을 분석한다. 두 나라의 관계가 달라지는 분기점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MFN(최혜국 대우) 지위 개선을 발표한 1994년과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친 2008년이었다.

1990년대 들어 개방 정책을 취한 중국은 수출 주도형 성장이라는 거대한 전환에 나섰다. 중국을 지정학적 경쟁자로 본 미국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은 중국을 견제하려 했고, 미국 정부는 중국이 인권 문제를 개선해야만 MFN을 갱신해 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국의 충돌’은 미·중 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는 근본 원인이 이념 차이가 아니라 자본 간 경쟁에 있다고 짚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5일 워싱턴 DC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화상 회담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대리(代理) 로비스트’로 쓴 것이 미국 기업들이었다. 중국 무역과 별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통신사 AT&T, 인공위성 제조사 휴스 일렉트로닉스, 에너지사 엑손 모빌, 항공기 업체 보잉 등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대륙의 거대한 시장을 염두에 두고 군침을 삼키며 벌인 포석이었다.

이들은 백악관과 상·하원에 “중국의 인권과 무역 자유화를 연계해선 안 된다”며 호소했다. 클린턴은 마침내 입장을 바꿔 인권 상황에 관계없이 중국이 낮은 관세로 미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저자는 이것을 돌이킬 수 없는 실책으로 봤다.

당시의 명분은 ‘중국을 세계 무역 시스템에 참여시키면 결과적으로 중국의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질 것’이란 논리였지만, 이것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었다는 얘기다. 피노체트의 칠레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시장자본주의는 오히려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이후 중국의 ‘생산’이 미국의 ‘소비’와 맞물린 무역 자유화의 시대가 전개됐고 미·중 두 나라는 ‘차이메리카’라 불릴 정도로 경제적 상호 의존 상태를 지속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중국 경제가 과잉생산의 위기에 빠지자 중국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친중(親中) 활동을 펼쳤던 미국 기업들 중 상당수는 토사구팽(兎死狗烹) 꼴이 됐다.

과거 중국의 로비스트 역할을 했던 기업 중 하나인 건설기계 제조 회사 캐터필러의 경우 2000년대 초 중국 건설기계 시장을 석권했지만, 2009년부터 중국 정부가 자국 제조업체들에 금융 지원을 쏟아붓는 바람에 고전하게 됐다. 중국제 굴착기의 자국 시장 점유율은 2009년 26%에서 2019년 62%로 치솟았던 것. AT&T는 중국의 규제 강화 때문에 중국 통신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하게 됐다. 모토로라는 무선 네트워크 기술을 도용한 혐의로 화웨이를 제소했으나 중국 정부의 압력으로 소송을 취하해야 했다. 이제 캐터필러를 포함한 여러 미국 기업은 방향을 180도 바꿔 중국에 반대하는 입법 활동을 위한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

2010년대 들어 미·중의 자본 간 경쟁은 지정학적 경쟁에 영향을 미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국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 해외에 과잉생산된 제품의 수출에 나섰고 이제 기존의 지정학적 강대국인 미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 됐다. 저자는 향후 전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중국은 예전의 독일보다는 훨씬 덜 군국주의적이어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자본을 둘러싼 미·중 양국의 경쟁은 몇 년 동안 격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