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 김경율의 '노빠꾸' 인생 책 표지

회계사 김경율의 노빠꾸 인생

김경율 지음|트라이온|316쪽|1만7800원

사내는 지금도 축제의 불꽃놀이를 편하게 즐기지 못한다. 광주에서 살던 1980년 5월의 어느 새벽 “아야, 들어봐라” 하는 아버지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밤하늘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5·18 의 마지막을 알리는 총성.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악몽 같은 시간을 견뎌냈다. 그가 열한 살 때 겪은 일이다. 소년은 자라 운동권 대학생이 되었다. 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졌고, 수배자가 됐고, 위장 취업 활동을 했다.

지난 정권 조국 전(前) 법무부 장관의 ‘내로남불’을 비판한 이른바 ‘조국 흑서’ 공동 저자이자, ‘대장동 사건’에서 불순한 돈의 흐름을 파헤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김경율(53) 회계사가 겪은 일들이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회계사 김경율의 노빠꾸 인생’(트라이온)을 출간했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란 그에게 고향은 원체험의 공간이다. 삶은 팍팍했고, 가난했기에 서정적이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1983)의 실제 공간인 남광주역 인근 산수동이 그가 자란 동네. 임철우 소설 ‘등대’(2002)에서 기찻길 옆 오막살이들이 게딱지처럼 낮게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던 곳이다. 김 회계사 역시 그 지붕 낮은 집들 가운데 하나에서 살며 초등학교를 다녔다. 여기에 엄마 손 잡고 친척 찾아 나선 길에 전남대 병원 응급실서 봤던 풍경, 동네 형과 구경 가서 봤던 탱크, 거리에서 뒹굴던 시신들 모습이 자신을 형성하는 기억의 조각들임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김경율은 코맥 매카시의 구절을 아꼈다. “운동권으로 계속 남겠다”는 의지의 선언처럼 들렸다. /박상훈 기자

그는 운동권 생활을 끝내며 덜컥(?)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다. “저는 고등학교 때 원래 이과였어요. 숫자도 좋아했고요. 그런데 재수를 하면서 학생운동을 하려고 문과로 바꿨죠. 하하.” 회계사가 된 뒤 최근까지 시민 단체 참여연대에서 활동해왔다. 주요 직책인 집행위원장까지 맡으며 론스타 먹튀 사건, 제일모직 삼성물산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굵직굵직한 사건 폭로 과정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 정권에서 20년이나 몸담았던 단체를 박차고 나왔다. 조국 사태를 둘러싼 이견(異見) 때문이었다. “저는 조국 가족 사모펀드 사건을 권력형 범죄로 봤어요, 그래서 ‘조국 장관 사퇴를 요구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개입해선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과연 이 단체가 뭘로 움직이나’ 회의를 갖게 됐죠.”

자신을 움직이는 힘이 앞뒤 재지 않고 한번 꽂히면 끝을 보는 ‘노빠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이즈음 했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솔직히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정의로운지도 모르겠고… 시쳇말로 피꺼솟(피가 거꾸로 솟구치는)하는 일에 흥분하며 반응한다…조국 사태 때도 그런 성질머리가 튀어나왔다.’ 노빠꾸 별명은 2013년 쌍용차 해고 무효 소송을 승소(2심)하면서 얻었다. 장안의 내로라하는 변호사들도 “못 이긴다”며 손사래치는 소송을 그는 혼자 밀어붙였다. 회사 측 회계 조작을 찾아내 해고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기는 그의 모습을 본 노조원들이 붙여준 것이다.

‘노빠꾸’이기에, 그의 ‘86 운동권’ 비판은 신랄하다. ‘젊음의 순정한 투쟁을 일신의 영광을 위한 알리바이이자 훈장으로 삼은 이들을 한껏 비판하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의 과거에 대한 예의다.’ 그는 “운동권이 ‘실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치명적 약점”이라고 했다. “실력이 없으니 나이 들어 권력과 결탁하거나 회유되고 이권에 눈독을 들인다”는 것. 문재인 정부 5년간 우리가 목도했던 것들이다.

김 회계사는 “앞으로 운동권으로 남겠다”고 했다. 지금도 ‘경제민주주의21′을 만들어 시민 단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참여연대 20년을 되돌아보며 ‘혹시 내가 무리한 주장으로 사회에 과한 비용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결론은 우리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며 “우리 사회가 ‘의심 없는 믿음’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하고 감시하면서, 지금처럼 페이스북에 하고 싶은 욕 실컷 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김 회계사는 ‘작은 불씨 하나는 계속 타오르게 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아무리 숨어있을지라도’라는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2006) 구절을 좋아한다. 5년쯤 전에 읽었다. 이번 책에서도 군데군데 이 작품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종말을 맞은 세상을 살아가는 부자(父子)의 모습에 어린 시절 나와 가족들이 겹쳐지고,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무언가’ 나타나 길을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삶인 것 같다”면서 “감히 ‘무언가’를 찾으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책이 발간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지난 16일에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경제민주주의21이 의혹을 제기한 모 금융지주사의 전(前) 회장 소송비 대납 사건 관련 조사를 위해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나가 있었다.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