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유석재의 악인전’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유석재입니다.

첫 번째 인물은, 요즘 역대 흥행 1위에 오른 한국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악인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인물이 있죠. 바로 조선 7대 임금 세조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유석재의 악인전'

먼저 6대 임금 단종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왕조에서 ‘장차 왕이 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최초의 왕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단종입니다. 세종대왕의 큰아들인 세자(임금 자리를 이을 임금의 아들·훗날의 문종)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년)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어요. 2대 정종과 3대 태종은 태어날 때 아버지 이성계(훗날의 태조)가 왕이 아니었고, 4대 세종은 조선 왕조 개국 이후 태어났으나 당시 아버지인 정안군(훗날의 태종)이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가 아닌 데다 본인도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5대 문종도 태어날 때 아버지인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이 세자가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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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嫡長子·본부인이 낳은 맏아들)가 문종이었고, 세자 시절의 문종과 세자빈 권씨(훗날 현덕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가 단종이었습니다. 세종 시절 단종은 적장손인 동시에 세손(世孫·왕세자의 맏아들로 왕위 후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었어요. 원손(아직 세손으로 책봉되진 않은 세자의 맏아들), 세손, 세자 단계를 모두 거쳐 왕이 된 경우는 조선에서 단종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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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에서 이런 군주를 몰아내려 했던 사람은 폭력적이고 무리한 정변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게 계유정난이었죠.

한국사에서 어린 조카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 그 혼자만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역공을 당하기는 했지만 고구려의 봉상왕이나 백제의 진사왕 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유독 ‘악인’으로 기억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권력을 탈취하고 정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잔혹했습니다.

1980년대 그에 대해 완전히 다른 평가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불안정한 정국을 바로잡고 나라를 반석 위에 세웠다는 겁니다.

다시 세월이 흐른 2026년, 그의 무덤인 경기 남양주시 광릉의 여러 지도 앱에는 ‘별점 테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악행을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본 관객들이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세조,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보다 실제 역사 기록이 더 잔혹했던 조선 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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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26일은 한국 문화재 역사상 악몽의 날입니다. 부산 용두산에 큰불이 났습니다. 이날 아침 6시 20분, 한 판잣집에서 식모가 촛불을 켜둔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촛불이 마룻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불은 바람을 타고 다닥다닥 붙어 있던 피란민촌의 판잣집 298동을 태웠습니다. 1명이 죽고 이재민 1422명이 발생했습니다.

불은 부산국악원 창고로 옮겨 붙었습니다. 그 안에는 6·25전쟁의 화마를 피하려고 부산으로 옮겼던 조선 왕조의 궁중 유물 4000점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언제 재발할지 몰랐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귀중한 유물 3500점이 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중에는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도 있었습니다. 세조, 숙종, 정조, 순조, 헌종의 초상화가 모두 불타 사라졌습니다. 이제 얼굴을 알 수 있는 근대 이전의 조선 임금은 초상화가 남아 있는 태조, 영조, 철종 세 명뿐인 상황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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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6년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임금 한 명의 얼굴을 더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바로 7대 왕 세조였습니다. 1935년 이당 김은호 화백이 왕실 주문을 받아 세조의 어진을 베껴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린 초본이 경매에 나온 것입니다. 드디어 그 사람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저렇게 후덕하고 인자해 보이는 얼굴이었다니. 여기저기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형제와 조카와 신하들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그 잔혹한 인물의 실제 얼굴이 저렇게 해맑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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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李瑈·1417~1468)는 세종의 차남입니다. 부왕이 왕세자가 되기 한 해 전에 지금의 서울 통인동에 있던 충녕대군 사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양대군’으로 오래 불리다가 1445년(세종 27년)이 돼서야 비로소 ‘수양대군’이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보다 4년 전인 1441년, 형인 세자(훗날의 문종)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오래도록 왕위 계승 2순위였던 수양대군이었으나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가 옥좌에 오를 수는 없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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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시절 수양대군은 저 초상화에 어울리는 ‘착한 아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친에게만큼은 효자였습니다. 1446년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장소는 수양대군의 사저였습니다. 큰 슬픔에 잠긴 수양대군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기록한 ‘석보상절’을 썼습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해 반포된 훈민정음으로 기록했습니다. 이것을 읽은 세종대왕이 크게 감동해 구절마다 그에 대한 찬가를 역시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책이 ‘월인천강지곡’입니다.

여기서 최소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수양대군은, 훗날의 세조는, 한글 발전에 대단히 큰 공을 세웠다는 것. 또 하나는, 소헌왕후가 좀 더 오래 살아 대왕대비로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은 절대 모친이 보는 앞에서 골육상쟁을 벌이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입니다.

1450년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수양대군의 형인 세자가 5대 문종 임금으로 즉위했습니다. 문종은 1452년 즉위 2년 만에 승하했으나 그사이 수양대군이 2인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종은 정통성과 능력을 모두 갖춘 군주였습니다. 세종 만년 5년 동안 대리청정을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문종의 치세를 7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세종 못지않은 성군이 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수양대군이 여러 차례 자잘하게 국법을 어겼다는 상소가 올라왔을 때도 문종은 “그는 충직해 다른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보호했습니다. 적어도 문종이 살아 있을 때 수양대군은 임금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7대 임금 단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정적인 김종서·황보인 등 대신들과 혈육인 안평대군을 동시에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계유정난’입니다. 그는 할아버지 태종이 금지한 사병을 몰래 키우는 등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참모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를 근거로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등을 칼로 베거나 철퇴로 때려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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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이 대단히 비겁하고 사악했습니다. 지금의 서대문 농업박물관 앞에 있던 김종서의 집을 밤중에 수양대군이 갑자기 찾아가 “관모 뿔이 떨어졌으니 관모를 좀 빌려 달라” 하고는 서찰 한 장을 읽어 보라며 내밀었습니다. 김종서가 그것을 달빛에 비추는 순간 부하가 철퇴를 내리쳤고 막아 선 아들 김승규도 칼로 찔렀습니다. 나중에 김종서가 죽지 않은 걸 알고는 또 찾아내 칼로 벴습니다.

반대파 살육과 동시에 미리 준비한 병력으로 경복궁을 장악했습니다. 친동생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가 곧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이때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습니다. 수양대군 자신은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같은 여러 요직을 겸직했습니다.

굳이 필요 없는 문장 같지만, 누가 봐도 전형적이고 명백한 쿠데타였습니다. 권력욕이 낳은 정변일 뿐 별다른 명분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없는 명분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반역을 계획했다’는 것입니다.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적어도 제5공화국 시절에는 어울리는 해석이었습니다. 쿠데타 세력을 정의롭게 묘사하는 사극은 당시 정부와 방송사 사이에 위화감을 일으키는 요인이 아니었을 겁니다. ‘조선왕조 500년’식의 이 같은 역사 해석의 전통은 의외로 끈질깁니다.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도 수양대군이 올바른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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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2년 뒤인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왕좌를 찬탈했습니다. 수양대군 일파가 지속적으로 양위를 압박한 결과였습니다.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돼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을 비롯한 신하들이 혹독한 고문 끝에 처형됐습니다.

그런데 ‘세조실록’ 1456년 9월 7일조엔 눈을 의심케 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죽은 충신들의 아내와 딸을 한확·정인지·한명회·홍윤성 등 공신들의 집에 노비나 첩으로 분배한 겁니다. 그 명단이 대단히 길고 정밀하며 집요합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 딸 효옥, 이승로의 누이 자근아지는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주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 딸 내은금, 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주고… 유성원의 아내 미치, 딸 백대, 이명민의 아내 맹비는 좌승지 한명회에게 주고….’ 전체 분량은 이 내용의 약 20배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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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언론사 선배는 이 기록을 본 뒤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이걸 사람이라 할 수 있나?”

사육신 사건을 빌미로 세조는 1457년 6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습니다. 세조는 “음식과 옷을 후하게 봉공해 종시(終始) 목숨을 보존해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고 명해 살려줄 듯한 액션을 취했으나, 불과 넉 달 만에 단종을 죽였습니다.

‘세조실록’은 가증스럽게도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적었으나 ‘선조실록’은 기대승의 말을 통해 ‘영의정 정인지가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리기를 청해 세조가 허락했고, 사형을 당하는 모습을 현지인이 기록했고 관찰사가 그것을 보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노산군이 끝까지 사약을 받기를 거부하자 노비를 시켜 강제로 목을 졸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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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친동생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보내 죽인 것도 이 무렵입니다. 단종 복위 거사를 하려 했다는 이유였지만 조작의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그래도 세조는 ‘임금으로서는 아버지 세종에 버금가는 치적을 쌓았다’는 평이 한때 있었습니다. 성문법인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했고(물론 경국대전엔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철퇴를 휘둘러 정적을 제거해도 된다거나, 왕위가 탐날 때는 양위받는 척한 뒤에 상왕에게 사약을 내릴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고 6조 직계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전국적 인구 조사에 성공했고 종묘제례악을 확립했으며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무엇보다 훈민정음을 본격적으로 보급했다는 것이 큰 치적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강압적인 철권 통치였습니다. 새로운 인재가 등용될 통로도 적었습니다. 정통성에서 취약한 정권을 유지하려다 보니 공신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졌습니다. 이들이 온갖 부패를 남발했고 세력화된 결과 훗날 사화(士禍)의 한 원인이 됐습니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의 사초에 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조는 또 사육신 등 반대파 상당수가 속했던 국왕 자문 기관인 집현전을 아예 폐지해 버렸습니다. 신분 제도로는 양인이 줄어들고 노비가 폭증하도록 하는 실책을 했고, 행정적으로는 지방 통치 체제가 와해됐으며, 군사적으로는 군역의 부담을 늘려 군인층 붕괴를 가져온 데다 군사 편제에서 활쏘기를 지나치게 중시해 백병전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종에 버금가는 치적? 그것도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억지로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그것조차 실패했다는 평가가 온당할 겁니다.

사실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보다도 훨씬 이전에 사실상 종결됐다고 봐야 합니다. 1698년(숙종 24년) 세조의 후손인 숙종은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존했습니다. 사후에 일어난 사실상의 복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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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선 1691년에는 사육신의 관직을 복구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계유정난의 희생자인 김종서와 황보인은 영조 때 복권됐습니다. 특히 김종서에게 내린 시호가 주목할 만합니다. 충익(忠翼).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날개처럼 군주를 보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안평대군을 옹립하려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수양대군 측 논리를 조선 왕조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부정했다는 것이 됩니다.

세조는 만년에 자신의 악행에 대해 일부 후회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하는데, 죽을 때가 가까워진 자의 두려움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난히 불교를 숭상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죽기 전 나병(한센병)에 걸려 고생했다는 얘기가 전하는데, 실록에는 병의 정체에 대해 잘 나오지 않지만 악몽, 불면증, 신경쇠약 등을 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조는 왕좌에 오른 지 ‘고작’ 13년 만인 1468년 9월 7일 세자에게 양위했습니다. 새 왕이 8대 예종인데 그는 재위 1년 2개월 만에 20세로 죽었습니다. 원래 세자였던 큰아들(추존왕 덕종·인수대비의 남편)은 단종이 죽기 한 달 전에 19세로 요절했습니다.

세조는 어떻게 됐을까요? 양위 바로 다음 날인 9월 8일 51세의 나이로 지금의 창덕궁인 수정궁에서 죽었습니다. 그곳은 단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절 거처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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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설중매’가 방영되던 1984년,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에 봉안됐던 유물 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바로 세조가 생전에 쓰던 명주 적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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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적삼에는 피와 고름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피부병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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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 병’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썼던 두 글자의 단어는 분명 비학술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입니다. 또한 기자 역시 지금껏 한 번도 기사에서 그 말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같은 병을 앓았던 다른 사람 누구라도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세조에 한정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제 단 한 번, 그 단어를 쓰려고 합니다.

세조의 그 병은, 아마도 ‘천벌’(天罰)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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