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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어(rare), 미디움(medium), 웰던(well-done)...

보는 순간 파블로프의 개처럼 군침이 질질 돌게 만드는 말들입니다. 노릇하게 익은 고깃덩이 사이로 핑크색 육즙이 자글자글한 스테이크가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습니까? 취향에 따라 굽기 정도를 선택하는 건 인간의 특권입니다. 불을 다룰줄 모르는 짐승들 세계에선 오로지 ‘레어’뿐입니다.

소등쪼기새 두 마리가 대표적 숙주인 얼룩말 등위에 앉아있다. 이들은 얼룩말 몸의 기생충 뿐 아니라 상처가 났을 때 피도 빨아먹고 살점도 뜯어먹는다. /위키백과

방금 잡았느냐, 좀 오래됐냐에 따라 ‘싱싱한 레어’나 ‘좀 된 레어’, 혹은 ‘썩어 문드러진 레어’일테죠. 오늘은 울트라 프레시 캡짱 싱싱한 레어 고기를 즐기는 깜찍한 새들의 먹방으로 시작됩니다. 갓잡은 고기도 아닌 멀쩡한 살아있는 짐승의 살속을 파고드니 이보다 선도 높은 피가 어디 있겠습니까? 먼저 인스타그램 동영상(naturematata)을 한번 보실까요? 다소 불편해보일 수도 있으니 비위가 약하신분들은 스킵하시길 권합니다. 특히 육고기 요리를 막 드셨거나 드실 분들은 더더욱 관람을 피하셨으면 합니다.

소등쪼기새가 말의 상처를 쪼아먹고 있다.

이 사바나얼룩말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자, 표범, 리카온, 하이에나, 악어... 얼룩말 고기를 탐닉하는 맹수들이 주위에 널렸습니다. 오늘도 포식자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지만, 생존의 대가로 커다란 자상을 입었습니다. 영광의 상처라기엔 상태가 심각합니다. 이미 썩어문드러지기 시작해 검게 변색된 생살과, 선홍색 핏빛의 생살이 지층을 이루네요. 살아남긴 했지만, 얼마나 아프고 쓰릴까요? 하지만 제로섬의 사바나에서 누군가의 고통은 누군가의 식도락입니다.

평소 초식동물의 몸에서 기생충이나 벌레를 잡던 소등쪼기새들은 몸뚱이에 난 상처를 보면 광분한다. 피와 살점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별미로 꼽힌다. /Elaphant Plains Game Lodge

한국의 참새가 방앗간을 놓칠리 없듯이 사바나에서 생살이 파헤쳐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 어김없이 모여드는 새들이 있습니다. 찌르레기의 일종인 소등쪼기새예요. 몸길이가 대략 23㎝니 참새와 비둘기의 중간쯤 되겠죠. 파스텔톤처럼 은은한 깃털색에 빨갛고 노란색의 부리를 가진 깜찍한 외모입니다. 이 귀여운 새들이 얼룩말의 찢긴 살점을 두고 피의 성찬을 벌입니다. 늘어붙은 살점을 쪼아먹는 동시에 살점을 적신 육즙으로 목을 축입니다. 연속된 쪼임에 고통스러워하는 얼룩말이 몸부림치지만, 새들의 식탐은 그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기들끼리 이렇게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룩말은 역시 피맛이지” “고럼. 고럼.” “캬~ 바로 이 맛일세~”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등쪼기새는 사바나의 생명의 바퀴를 우직하게 굴려주는 생태계의 키 플레이어입니다. 코뿔소, 물소, 기린, 영양 등 덩치 큰 초식동물들의 등과 배에 달라붙어 진드기나 각종 기생충을 쪼아먹어주거든요. 초식동물을 입장에서는 위생과 청결을 책임져주고, 새로서는 끼니를 연명하는 것이니 대표적인 공생관계로 봐야겠죠. 그런데 재미난 것은 소등쪼기새의 식성이 단순히 벌레잡이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리거나 찢겨서 피가 흐르거나 핏빛 살점이 드러나는 순간, 놈들은 뱀파이어로 돌변합니다. 소등쪼기새가 소 뿐만 아니라 말등의 핏빛살점도 쪼는 유튜브 영상(Lynette Rudman) 한 번 보실까요?

소등쪼기새가 얼룩말의 살점과 피를 먹고 있다.

이런 뱀파이어식 식성이 공격당하는 동물들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상처가 기생충 등에 추가로 오염돼 덧나거나 악화하는 걸 막아주는 효과도 있다는 거죠. 물론 그건 상처입은 짐승들이 추가 공격을 받지 않고 온전하게 버텨낸다는 가정 하에 가능할 것입니다. 소등쪼기새들은 기생충을 쪼아먹는 것 말고도 초식동물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최고 성능의 비상벨입니다. 사냥꾼들이 접근할 때 일제히 날아오르면서 짐승들에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거든요. 어쩌면 그 대가로 싱싱한 피와 ‘레어’한 살점을 제공받는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짐승의 피는 생명수입니다. 한 생명의 몸뚱이가 지탱될 수 있도록 해주죠. 그런데 포식자 입장에서도 피는 각종 영양분을 함유한 생명수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부위를 제쳐두고 피만 먹으면서 생존하도록 특화된 개체들이 있어요. 자연계의 뱀파이어들이죠. 모기나 파리같은 벌레들이 아닌 붉은 피가 흐르는 척추동물 중에서도 다른 짐승의 피를 탐닉하면서 연명하는 종류들이 있습니다.

뱀파이어 그라운드 핀치가 덩치 큰 새의 살갖을 찢고 흐르는 피를 빨아먹고 있다. /Galapagos Conservation Trust

새 중에서는 아예 뱀파이어라는 이름이 붙은 새가 있어요. 아프리카에서 한참 떨어진 갈라파고스섬에 살고 있는 뱀파이어그라운드핀치죠. 핀치하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갈라파고스섬에서 사는 동일한 핀치새인데도 어느 곳에 살면서 어떤 먹이를 먹느냐에 따라 부리 모양이 달라진다는 관찰 결과가 진화론 연구의 주된 내용이죠. 그런데, 뱀파이어그라운드핀치의 식성은 아주 극단적으로 적응했습니다. 척박한 먹이 환경에서 놈들이 선택한 것은 바로 피거든요. 부비새 같은 덩치 큰 새들의 목덜리와 뒤에 자리잡고 사정없이 쪼아대서 나오는 핏물을 한여름날 커피우유를 마시듯 쪽쪽 빨아먹습니다. 그런데 소등쪼기새와 마찬가지로 이런 흡혈은 상처 소독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뱀파이어 하면 어찌 이 짐승을 빼놓을 수 있겠습니까? 뱀파이어와 드라큐라의 모티브가 된 흡혈박쥐 말입니다. 드라큐라의 원산지(?)는 동유럽이지만, 흡혈박쥐는 중남미에 골고루 분포해있습니다. 소·말·돼지·개·사람 등 철저히 길들여진 동물들만 노리고 있어요. 곤히 잠든 틈을 타 끝이 뾰족한 역삼각형의 한쌍의 앞니로 살갗을 째고 흘러나오는 피를 혀로 할짝이며 목구멍으로 넘깁니다.

소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흡혈박쥐. 이 장면은 멕시코에서 촬영됐으며, 이 소는 광견병에 걸려 폐사했다고 한다. / Luis Lecuna, USDA APHIS, International Services, Mexico.

이 탐식의 과정이 워낙 매끄럽고 은밀하다보니 피를 헌납하는 숙주 대다수는 자기가 피를 빨리는 줄도 모른다고 합니다. 피가 모자라면 살 수 없는 동물이기에 흡혈은 필사적입니다. 그래서 피로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배를 앞세우고 날지도 못한채 날개로 엉금엉금 걸어다니는 장면이 이따금씩 포착되곤 합니다. 사람 피를 하도 많이 빨아먹어서 배가 부풀어오른채 제대로 날지도 못하던 모기의 모습과 빼닮은 거죠. 흡혈박쥐는 단순히 피만 빨아먹는게 아니라 광견병 같은 악성 감염병을 옮긴다는 점에서 몸집은 작지만 괴수라 할 만합니다.

대표적인 흡혈어인 칠성장어. 평생 저렇게 쩍 벌린 입으로 다른 물고기 몸통에 흡착해 살점을 갉아먹고 피를 빨아먹는다. /Ted Lawrence/Great Lakes Fishery Commission

물고기계 최고의 흡혈어는 단연 칠성장어입니다. 물고기중에서도 가장 괴이쩍고 원시적인 종류에 속하는데요. 여느 물고기들처럼 아래 위턱을 여닫으며 입을 뻐끔거리는게 아니라, 턱 자체가 없고 평생 쩍 벌리고 다니는 주둥이에는 날카로운 톱니바퀴 같은 빨판이 줄달음질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리를 입이 둥글다고 해서 원구(圓口)류라고도 하고, 턱이 없다고 해서 무악(無顎)류라고도 해요. 바다와 강을 오가면서 살다가 연어·송어·고등어·대구 같은 싱싱하고 건강한 물고기들의 몸뚱아리에 착 달라붙은 뒤 살점을 파헤치고 살을 갉아먹는 동시에 피를 흡입합니다. 당하는 물고기입장에서는 알면서도 떼어낼 수가 없으니 죽을 맛일 겁니다. 이렇게 피와 살을 빨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느니 낚싯대에 걸려서 횟감이 되거나, 물수리에게 나꿔채져 새들의 점심식사로 생을 마무리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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