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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새까맣게 뒤덮은 것은 머리칼같습니다.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 한움큼씩 뽑아 흩뿌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 쌓이는 머리칼을 치우지 않고 1년동안 내버려둔 샤워부스 수채구멍이 이렇지 싶습니다. 공포영화 시리즈 ‘링’의 원혼 사다코의 흑발이 떠올라 오싹하기도 하네요.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이 얼마 전 소셜미디어에 올려놓은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 속 피사체는 알고보니 살아움직이는 벌레였습니다. 머리칼만큼 가느다란 벌레들 수천마리가 뭉쳐서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거대한 무리를 이루면 포식자로부터 습격당할 가능성을 단 몇%라도 줄일 수 있는 약자들의 생존법칙이죠. 이 기괴한 사진속 주인공은 바로 하베스트멘(harvestmen)이라고 불리는 절지동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님거미’ 또는 ‘통거미’라고 부르고요. 미국에서는 아빠의 기다란 다리(daddy long leg)라는 재미있는 별칭도 있죠. 조금 확대된 사진을 보실까요?

쥐어뜯은 머리칼이 아니다. 알래스카의 한 건물에서 하베스트멘 수천마리가 한데 뭉쳐있는 모습이 발견됐다. /미 국립공원관리청 인스타그램

가운데 몽툭한 몸통을 두고 다리 여덟개가 달려있습니다. 영락없는 거미같아보이지만, 엄밀히말해서 ‘유사거미’라고 부르는게 정확합니다. 거미류(arachnid)에 속하지만 거미(spider)는 아니거든요. 거무튀튀한 모습을 한 이 유령 같은 생물들은 알래스카에 있는 글레시어 베이 국립공원 및 보호구역에 있는 한 건물에서 발견됐습니다. 이 족속에 속한 무리가 전세계에 무려 6500여종이나 된다고 해요. 근본적인 물음은 왜 이들이 ‘거미’가 아닌 ‘유사거미’냐는 것이죠. 하나하나 따져보면 차이점이 적지 않습니다. 거미는 같은 몸통이라도 확실히 구분이 돼있습니다.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배인지 말이죠.

하베스트멘은 거미와 마찬가지로 네 쌍의 다리가 있지만, 거미줄을 칠 수 없고, 신체 구조도 거미와 다르다. /미 국립공원관리청 인스타그램

반면 이 녀석들은 그냥 둥그스름한 몸통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통거미’라는 이름이 납득이 갑니다. 통상 여섯개에서 여덟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거미와 달리 하베스트멘은 사람과 같은 한쌍의 눈에 의존해 살아갑니다. 시력도 형편없어요. 이러니 ‘장님거미’라는 작명이 이해가 돼요. 뿐만 아닙니다. 엉치 끝에서 실을 자아내 단숨에 그물 같은 거미줄을 치는 거미의 필살기도 이들에겐 없죠. 하지만 다리만큼은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합니다. 날렵한 몸통에서 사방으로 뻗은 여덟개의 다리는 한눈에 봐도 ‘롱다리’거든요. 어릴 적에 봤던 우람한 아버지의 덩치처럼요. 이 족속들은 썩은 통나무, 바위덩이, 응달진 콘크리트 건물 등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 주로 터잡고 살아갑니다. 포식자가 다가왔을 때 몸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긴 해도 일부 거미처럼 치명적 독을 뿜어내지도 않습니다. 거미처럼 생겼지만, 거미다운 강점은 죄다 내버린 듯 해요.

하베스트멘은 전세계에 6500여종이 있고, 종류마다 몸색깔 등이 천차만별이다. /미주리주 홈페이지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거미를 능가하는 모습도 보여요. 특히 먹는 것과 성생활에서는 인간 등 포유동물에 더 가깝습니다. 이 녀석들은 음식을 굳이 가리지 않는 잡식성입니다. 다른 짐승의 사체나 배설물은 소중한 영양분 덩어리로 빼놓지 말아야 할 일용의 양식입니다. 사냥꾼이기도 해서 진딧물처럼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죠. 보통의 거미들이 거미줄로 옴짝달싹못하게 해놓은 먹잇감을 흐물흐물하게 녹여서 액체 상태로 쪽쪽 빨아먹는 방식으로 흡입하는데 비해, 뭉텅이로 잘라서 입속으로 넘깁니다. 포유동물이나 새, 파충류와 식습관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하베스트멘의 맵시있는 여덟 개의 다리는 거미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미주리주 홈페이지

통상적으로 거미의 짝짓기는 암컷과 수컷이 만나면, 수컷이 정자가 들어있는 캡슐형태의 덩어리를 암컷의 생식기관을 통해 집어넣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사랑을 나눈다’라는 표현이 어색하리만치 암수가 뜨거운 몸짓을 나누는 다른 짐승들에 비해 냉정하고 사무적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어색한 풍경이 하베스트멘에게는 없습니다. 암컷과 수컷이 만나 보다 직접적으로 교감을 합니다. 거미와 비교해선 상대적으로 적극적이고 과감하다고 볼 수 있지요. 이렇게 암수가 정을 나누며 얻게 된 새끼들은 주로 암컷이 돌보지만, 경우에 따라선 이 일을 수컷이 도맡기도 합니다. 암컷의 독박육아가 두드러지는 거미와 확실히 차별되는 부분입니다.

하베스트멘의 일종인 '갑옷하베스트멘'. 딱딱한 등갑처럼 생긴 몸통이 확연히 눈에 띈다. /미주리주 홈페이지

수천마리가 군집을 이루는데서 볼 수 있듯 개별 개체를 노리는 포식자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천적을 쫓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앞서 언급했던 역한 냄새가 나는, 그러나 치명적인 독성은 없는 물질을 홱 뿌립니다. 스컹크를 연상케하죠. 그것도 먹히지 않을때는 ‘도마뱀 모드’로 돌입합니다. 천적과 옥신각신하다가 다리가 툭 끊어질 때가 줄행랑의 적기입니다. 몸에서 떨어져나온 다리가 꼬물꼬물 움직이면서 포식자의 주위를 흩뜨려놓거든요. 마치 도마뱀의 잘린 꼬리가 여전히 꾸불텅대면서 사냥꾼의 시선을 산만하게 하는 것처럼요. 응달진 곳에서 음산하면서도 기묘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 유사거미들은 그러나 인간 생활에서는 더없는 익충입니다. 동물의 배설물이나 사체 같은 폐기물들을 깔끔하게 치워주는 청소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외모가 주는 기괴한 모습 때문에, 썩 유쾌하지 않은 이미지의 벌레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합니다.

다소 징그러운 겉모습 때문에 비호감 곤충으로 수난을 겪고 있는 꼽등이. /국립생물자원관 홈페이지

단지 좀 징글맞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밉상곤충처럼 인식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하베스트멘이 가진 비애는 어쩌면 우리나라의 곤충 꼽등이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뚜기·풀무치·여치·방아깨비 등과 함께 곤충계의 귀족인 메뚜기목에 속하지만, 몸 색깔이 우중충하고 날개가 퇴화했으며, 쿰쿰하고 츱츱한 응달진 곳에 주로 집단 서식하다보니 꼽등이는 불행하게도 ‘외모가 해충인’ 가련한 벌레가 돼버렸거든요. 그러나 이들은 지금도 어느 음습한 곳에서 아무도 치우려하지 않는 배설물과 사체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며 분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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