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같은 큰 스포츠 경기대회가 열릴때면 마스코트도 자주 보게 됩니다. 각종 장외이슈로 더 뜨겁기도 했던 올겨울 베이징올림픽의 마스코트는 판다였어요. 사실 대회조직위원회가 빙둔둔이라는 이름의 판다를 마스코트로 발표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치만 무난하니까”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열리는 스포츠대회 마스코트에 판다가 등장한 것만 이번이 세번째입니다. 중국이 개최한 사실상의 첫 종합스포츠대회인 1990년 베이징 여름 아시안게임에 ‘판판’이라는 판다가 나왔어요. 2008년 여름 베이징올림픽때는 푸와라는 다섯개의 마스코트가 나왔는데, 그 중 숲을 상징하는 ‘징징’이 판다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또다른 판다인 ‘빙둔둔’이 올림픽 경기장 곳곳에서 관객 및 시청자들과 만났습니다. 코로나라는 태생적 변수 때문에 올림픽 분위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럼에도 ‘귀엽고 깜찍해야 한다’는 마스코트의 기본요건은 충족하는지 마스코트에 대한 나쁜 말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캐릭터로 만들기에 판다만큼 적합한 동물도 없죠.
만화 쿵푸팬더, 란마1/2 등 세대를 초월해 친숙한 판다 캐릭터들이 적지 않죠. 여느 곰보다 작고 오동통한 몸매. 흑백의 몸색깔과 앙증맞은 눈두덩. 이처럼 판다와 도플갱어처럼 빼닮은 곰이 지구 저멀리에 살고 있습니다. 판다의 고향 중국 쓰촨성 대나무 숲과 정반대인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에 사는 안경곰(Spectacled Bear)입니다. 생긴 것, 습성, 분위기가 닮은 듯 다르고, 구별되는 듯 복사판입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미지의 대륙으로 남아있는 남미가 원산지라서 더욱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서식지가 1만8000㎞나 떨어져 자연상태에서는 전혀 볼일이 없는 두 곰의 유사점에 주목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일종의 도플갱어 같은 느낌이죠. 자연계에 ‘곰의 법칙’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원칙이 있습니다. 곰은 오세아니아와 남극을 뺀 지구촌 곳곳에 분포하지만 덩치와 사는 지역의 온도는 철저히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덩치와 파워, 성질머리로 따져서 금·은메달을 다투는 북극곰과 회색곰이 가장 덩치가 큽니다. 그 다음으로 조금 따뜻한 곳에 사는 불곰, 아메리카 흑곰, 지리산 터줏대감이 된 반달가슴곰으로 갈수록 몸집은 아담해집니다.
안경곰은 인도와 주변 지역에 사는 느림보곰, 동남아시아 정글에 사는 말레이곰, 판다와 함께 작은 곰 무리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이 곰의 얼굴은 판다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생김새입니다. 판다의 얼굴이 흰 바탕에 눈 부분만 검은 얼룩이 졌는데, 안경곰 역시 흰 얼굴 바탕에 눈주변은 검거든요. 하지만 흑백이 밝은 톤으로 매치된 판다와 달리 안경곰은 몸 전체가 우중충한 검은색입니다. 그래서 좀 더 성숙하고 어둡다는 느낌을 주죠. 판다가 해라면, 안경곰은 달. 판다가 플러스라면 이 곰은 마이너스라고나 할까요? 마치 같은 정반대의 운명을 타고 난, 만나서는 제로섬으로 소멸하고 말, 비운의 쌍둥이같다는 느낌입니다. 다만 눈가의 검은 두덩 때문에 무섭다기보다 푸근하고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도 매한가지입니다.
사냥해서 고기를 먹는 맹수 곰 패밀리의 일원이지만, 이들의 식성은 잡식을 넘어서 초식에 더 가깝습니다. 판다가 오로지 대나무만 먹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안경곰도 초식곰입니다. 하지만 판다처럼 극강의 편식가는 아니어서 나무·잎사귀·줄기·뿌리·열매 등 먹을 수 있는 식물만 300여종에 달한대요. 다만, 판다만큼 완벽한 비건은 아니어서 달팽이부터 가금류까지 종을 가리지 않고 고기도 이따금씩 섭취합니다.
안경곰이 판다와 빼닮은 점이 또 있습니다. 여느 곰과 달리 소리를 활용해 활발하게 의사소통을 한다는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곰의 소리는, 회색곰이 사냥감을 잡은뒤 뜯어먹기 전. 또는 짝짓기철 영역다툼을 하며 울부짖는 무시무시한 소리 정도입니다. 반면 안경곰이 내는 소리는 새처럼 끽끽대거나, 쥐처럼 찍찍거리거나, 고양이처럼 갸르릉하는 등 훨씬 톤도 음색도 다양해요. 여느 곰과 비할 수 없는 다언어구사자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다양한 음색과 음성으로 입체적으로 상호 소통을 하는 종류는 곰 중에선 판다와 안경곰 밖에 없다고 합니다.
곰 무리에 속하긴 해도 안경곰과 판다는 다른 곰들과의 차이점 때문에 분류학적으로 별도로 구분되고 있답니다. 안경곰의 경우 여느 곰보다 주둥이는 짧고 이빨 구조도 확연히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안경곰의 조상은 1200만년전까지는 북아메리카에도 살고 있던 것으로 화석발굴조사결과 확인됐어요. 덩치도 북아메리카를 주름잡고 있는 회색곰들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지상최대의 곰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남아메리카에 특화된 종이 됐습니다. 그래서 안경곰은 현존하는 곰 중에 유일하게 적도 아래 남반구에서만 살아가는 곰이라는 생태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요 유명 동물원들도 보전에 부심하고 있죠. 미국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동물원에서 자라고 있는 안경곰의 영상 잠시 보시죠. 판다 못지 않게 깜찍하지 않나요?
안경곰은 짐승의 왕국 아마존 대신 험준한 안데스 산맥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 곰을 ‘안데스 곰’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입니다. 척박한 산악지대일지언정 괴수급 맹수들의 총집합소인 아마존 정글을 벗어나기로 한 것은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 된 것 같습니다. 아나콘다와 재규어, 카이만, 왕수달 등 한성깔하는 터프한 짐승들 틈에서 살벌한 하루하루를 보내기란 쉽지 않죠. 그래도 아메리카 대륙의 양대 고양잇과 맹수인 퓨마와 재규어는 가장 무서운 자연의 천적입니다.
그래도 사람만한 천적이 있을까요? 유라시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의 곰이지만, 고기와 신체 부위를 노린 밀렵꾼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곰들의 공통적인 가혹한 운명이 됐습니다. 야생에 8000~1만6000마리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어요. 1825년 탐험가들에 의해 칠레에서 처음 발견됐지만, 정작 칠레에선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르헨티나·페루·볼리비아·에콰도르·콜롬비아 등의 극히 일부지역에서 어렵게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페루 마추픽추 리조트 설립 등 남아메리카의 관광지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서식지도 큰 위협을 받고 있고요. 아무쪼록 체계적인 보호 시스템이 완성됐으면 합니다.
남아메리카는 축구의 대륙으로 인식돼있습니다. 겨울스포츠와는 애당초 인연이 없는 곳으로 꼽히곤 하죠. 하지만, 남아메리카의 끝은 남극과 맞닿아있습니다. 험준하고 척박한 안데스의 설원과 파타고니아는 겨울철 스포츠를 즐기게 안성맞춤입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부에는 유명 스키 리조트들이 밀집해있고요. 유럽과 북아메리카·동북아시아 등 특정 지역에서 집중해서 열려온 겨울올림픽이 언젠가는 남아메리카에서도 열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가 되면 안경곰도 멋진 마스코트로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