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避妊). 원치 않는 임신 걱정 없이 마음껏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가 깃들어있는 단어죠. 방법은 여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일이 모두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고난도 방식을 동원하더라도 피임의 벽을 거뜬히 돌파해내고 태어나는 생명들이 있거든요. 더러는 신의 뜻이라해서 더욱 축복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죠. 요즘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는 강고한 피임의 벽을 뚫고 세상에 태어나 사육사들을 놀라게 한 어린 생명 얘기가 화제입니다. 말 그대로 팔이 매우 긴 주머니긴팔원숭이, 일명 샤망(Siamang)입니다.
지난달 22일 동물원 동양관에서 주머니긴팔원숭이 암컷이 순산을 했습니다. 아직 암컷인지 수컷인지 성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미 품에 안겨서 조물딱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신생아입니다. 현재 과천에는 암컷 두 마리, 수컷 두 마리, 그리고 아직 어려서 성별여부를 알 수 없는 한 마리가 있는데, 여기에 소중한 한 식구가 추가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 식구를 맞이하는 동물원 사람들은 평소보다 좀 더 바빴답니다. 그건 바로 이 아기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존재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각자의 사정과 의지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피임이 이뤄지는 것처럼 동물원에서도 피임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입니다. 공간이 한정돼있는 상황에서 혈기왕성한 동물들의 사랑을 언제나 허(許)하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거든요. 그건 당장 법정 사육 공간 확보라는 현실적 문제와 동물들의 삶의 질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번식능력과 생산성이 좋은 건강한 동물들에게는 종종 피임조치가 취해진답니다.
주머니긴팔원숭이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코뿔소나 코끼리처럼 2세 순산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희귀종에 비해 주머니긴팔원숭이는 숨풍숨풍 새끼를 잘 낳으며 건강을 과시해왔죠. 그래서 이들에게도 피임조치가 취해졌어요. 피부 이식형 피임제로 유명한 ‘임플라논’을 시술한 것입니다. 눈에 보일랑말랑한 이식물을 피부 깊숙이 삽입하면 발정 징후를 보이지 않게 되고, 만의 하나 짝짓기를 했다고 해도 임신이 되지 않도록 호르몬이 작동합니다. 2019년 7월에 새끼를 낳았던 가임기 암컷에게 임플라논을 시술해, 이들이 마음껏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피임 시술을 한 암컷이 지난 5월부터 뭔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몰라보게 살이 쪄오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저 잘먹고 잘살고 있기 때문에 살이 데룩데룩 찐것으로 보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상황을 직감했고, 동물원 사람들은 임신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소변을 채취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6월 22일 마침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 생명이 깜짝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노련한 베테랑 사육사들과 수의사들의 대처로 산모와 아기는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동물원에서는 각 동물의 특성에 맞게 맞춤형 피임법을 적용합니다. 아예 난소를 적출하는 중성화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이번처럼 향후에 임신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임플라논 시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임플라논 시술을 시행했는데도 그 강고한 ‘벽’을 뚫고 임신으로 이어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네요. 여러가지 원인을 분석해봐야겠지만, 7개월이라는 임신기간을 고려하면 임플라논 시술 전후로 수컷과 사랑을 나눠서 임신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이번 임신과 출산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큰긴팔원숭이가 유인원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 무리인 영장목은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차라리 쥐에 더 가깝게 생긴 가장 원시적인 영장류인 나무타기쥐(투파이)부터 마다가스카르의 상징 여우원숭이, 흉포한 사냥꾼 개코원숭이, 가장 전형적인 원숭이의 모습을 한 마카크(일본원숭이 등의 무리) 등이 있는데, 가장 고등한 무리가 바로 사람과 아주 가까운 유인원이죠. 고릴라·침팬지·성성이(오랑우탄)와 함께 유인원 4인방을 이루는 긴팔원숭이는 가만히 서있어도 땅에 닿고도 남는 기다란 두 팔로 현란한 나무타기 솜씨를 선보여 늘 동물원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원치 않는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나중에 자라서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위인이 된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임플라논을 뚫고 태어난 새끼도 코로나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희망의 존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