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용띠해에 태어났습니다. 저와 같은 용띠들은 특별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열 두 띠 중에서 유일하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 전설의 짐승이 상징이라는 점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용은 신비로우면서도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다뤄져왔습니다. 만화영화의 명가 디즈니의 작품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1977년과 2016년 두 차례 실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피트와 용’에서 용은 동심을 간직한 어린이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이자 다정한 친구로 그려집니다.
1998년 작 ‘뮬란’에서는 집안 수호용인 ‘무슈’가 수다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주인공 뮬란의 길동무 역할을 하죠. 여기 또 하나의 ‘디즈니 용’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번 주 개봉되는 최신작 애니메이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용은 위기에 빠진 인간 세상을 구해주는 수호의 존재로 그려진다고 하네요. 그런데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디즈니 만화영화 중 처음으로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왜냐면 동남아시아에는 진짜 용이 살고 있거든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에 유일하게 ‘용’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코모도 드래곤, 즉 코모도 왕도마뱀입니다. 인도네시아 코모도 섬을 비롯해 주변 일부 섬에만 5000여마리만 생존해있는 멸종위기종이자, 생태적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원시 파충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화석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구촌 맹수 마니아라면 모를 리가 없는 야생의 포식자이자 사냥꾼이죠.
◇악어와 맞먹는 몸집에 온몸이 살인병기
도마뱀 무리들은 생김새와 습성에 따라 리저드(lizard·일반적인 도마뱀), 게코(gecko·발바닥 빨판이 발달한 도마뱀붙이), 모니터(monitor·왕도마뱀) 등으로 불립니다. 변신의 마술사 카멜레온과 애완용으로 널리 사랑받는 이구아나 역시 도마뱀 무리죠. 코모도 왕도마뱀은 ‘모니터’에 속하지만, 유독 ‘드래곤’으로 명명됐습니다. 이 짐승의 생김새를 보면 왜 용이라고 부르는지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다 자라면 몸길이는 3m에 몸무게는 150㎏까지 훌쩍 넘는 세계 최대의 도마뱀입니다. 어지간한 악어와 맞먹는 몸집입니다. 달릴 때는 최대 시속 20㎞까지 속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네 발을 성큼성큼 딛으며 달려가는 모습, 영역 다툼을 할 때 뒷발을 딛고 일어나 마치 복싱을 하듯 상체를 벌떡 세우는 모습은 공포와 감탄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만화 속 용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며 입에선 불을 뿜어내는 전투력 최강의 괴수입니다. 한편 나약한 인간을 지켜주고 보듬어주는 든든한 수호천사죠. 하지만 현실의 용은 입에서 불대신 독액을 질질 흘리며 사냥감을 탐닉하는 냉혈한의 괴수입니다. 습성을 살펴보면 패륜의 아이콘, 막장의 대명사라고 할만도 합니다.
사슴, 멧돼지, 물소, 심지어 덩치가 작은 동족까지... 코모도 왕도마뱀 식단에 올라있는 주요 메뉴입니다. 일단 이 짐승의 목표물에 들어오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우거진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사냥감이 어기적어기적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 전광석화처럼 튀어올라 날카로운 발톱으로 일격을 가하고 톱니바퀴 같은 이빨로 덥석 뭅니다. 깜짝 놀란 길짐승이 습격 현장을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쉴지도 모르지만, 이는 죽음의 전주곡일 뿐입니다. 코모도 왕도마뱀의 타액에는 맹독 성분이 득시글거리거든요. 이빨 자국을 따라 스며든 이 맹독 성분은 상처의 응고를 막고, 혈압을 급속히 떨어뜨리며 쇼크를 가져옵니다.
쇼크로 넘어져 버둥거리는 먹잇감에서 풍겨오기 시작한 죽음의 냄새를 맡고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여유롭게 다가옵니다. 이 냉혈한은 먹잇감의 숨이 끊기길 기다려주는 최소한의 자비 따위는 베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강철처럼 탄탄한 목근육을 홱 움직여 먹잇감의 털가죽과 근육을 북엇살 뜯듯 찢어냅니다. 특히 코모도왕도마뱀이 만삭의 사슴을 탐식하는 장면은 ‘차라리 영화였으면...’이라는 비탄을 자아냅니다. 쇼크로 쓰러진 암사슴의 배를 찢어 버둥거리는 새끼를 끄집어내 어미 눈앞에서 삼켜버린 뒤 결국은 새끼를 잃은 어미까지 산채로 먹어치우거든요. 이 괴수들은 동족이라고 해서 보듬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에서 부화한 어린 코모도왕도마뱀은 본능적으로 나무위로 올라갑니다. 안 그러면 알에서 나오자마자 집안 어른들의 밥상에 오르게 되거든요.
◇수컷없이도 암컷 홀로 자기복제도 가능
여느 짐승처럼 코모도 왕도마뱀도 번식철이 되면 짝짓기에 나섭니다. 진회색에 거친 비늘을 암수 한쌍이 서로의 몸을 핥고 부둥키는 장면을 보면 ‘역시 이성에게 끌리는 생명체구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코모도 왕도마뱀의 번식은 범상치가 않습니다. 척추동물 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단성생식이 가능한 동물입니다. 여느 척추동물과 다른 독특한 염색체 구성으로 인해 수컷으로부터 정자를 공급받지 않고도 암컷 혼자 낳은 알이 유정란이 돼 새끼로 부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 짐승을 사육하고 있는 일부 동물원에서 확인됐습니다.
미국 테네시주 채터누가 동물원에서는 2019년 9월 암컷 코모도왕도마뱀 ‘찰리’가 낳은 세 개의 알이 무사히 부화하는 경사가 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동물원 측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의미심장한 발표도 같이 했습니다. 이번 번식이 단성생식, 닥시 말해 자기복제일 가능성도 조사하겠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여섯 달 뒤인 작년 3월 단성생식이었음을 공식 확인했다고 발표합니다. 곡절은 이랬습니다. 이 동물원에는 수컷 코모도 왕도마뱀 ‘카달’도 있습니다. 동물원 측은 코모도 왕도마뱀 2세 탄생을 기대하고 ‘찰리’와 ‘카달’을 합사시켰습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소닭보듯 하는 데면데면한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번식은 실패한 것으로 결론내려졌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낳은 알에서 새끼 3마리가 나왔습니다. 결국 정밀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세 마리는 어미 ‘찰리’의 유전자로만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이 됐습니다. ‘카달’로서는 새끼들에 대한 친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 셈이죠. 코모도 왕도마뱀의 단성생식은 주변에 마땅한 수컷이 없는 등 극단적인 환경이 조성될 때 일어나는 고육책의 성격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단성생식을 통해 만들어지는 2세는 전부 수컷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단성생식이 지속된다면, 결국 근친상간과 유전적 다양성의 감소로 멸종 위험이 더욱 높아진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무서운 동물을 숭배해왔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멸의 괴수 신화가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공룡과 고질라, 킹콩 같은 거대 괴수가 등장하는 SF영화가 변함없이 제작되고 있으며, 자연다큐멘터리의 몸값 높은 주역들은 사자·호랑이·악어·아나콘다 같은 흉포한 맹수들입니다. 코모도 왕도마뱀 역시 존재가 확인된 이래 끊임없이 사람들을 매료시켜온 맹수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런 매력 외에 특유의 맹독과 단성생식 습성은 앞으로 인체 질병 연구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그러나 코모도 왕도마뱀이 처한 상황은 녹록치가 않습니다. 서식지 주변에서 벌목 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먹잇감인 초식동물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생존에 빨간 불이 켜진 상태거든요. 이 징그럽고 무섭지만 매혹적인 괴수가 디즈니 최신 만화영화 제목처럼 ‘마지막 드래곤’이 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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