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샤롯데씨어터. 백스테이지에서 무대 아래로 통하는 문을 열자 음악 소리가 차올랐다. 연주자도 악기를 튜닝하고 워밍업을 하느라 배우만큼 바빴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낮 공연을 30분 앞둔 풍경이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오케스트라 피트로 향했다. 입구 쪽 천장이 낮아 들어갈 땐 고개를 수그렸다. 눈앞에 어둡고 긴 구덩이(pit)가 펼쳐졌다. 말하자면 ‘음악 채굴장’이다. 악보가 놓인 보면대(譜面臺)마다 손바닥만 한 모니터가 붙어 있었다. 지휘하는 모습을 적외선 카메라가 촬영해 연주자에게 실시간 전달한다. 배우들이 객석 2층에 있는 큰 모니터로 지휘자를 보며 노래한다는 사실을 아는 관객은 극소수다.
‘맨 오브 라만차’ 무대는 스페인 지하 감옥. 신을 모독한 죄로 끌려온 작가 겸 배우 세르반테스는 죄수들과 함께 즉흥극으로 변론을 시작한다. 지하 감옥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가 있는 셈이다. 악기 구성은 기타와 목관 악기, 금관 악기, 드럼, 퍼커션 등으로 짜인 17인조. 드럼과 퍼커션처럼 소리가 큰 악기는 피트 바깥에 부스를 따로 두었다. 20년 차 연주자 서영도씨는 “플라멩코 음악이고 관악기가 중심이라 열정적이고 웅장하다. 구덩이 속에만 머물다 보니 뮤지컬을 본 적은 없다”며 웃었다.
공연 시작 10분 전, ‘팬텀싱어’ 심사위원으로 낯익은 김문정 음악감독(지휘자)이 들어왔다. 지휘석은 한복판 계단 위에 있다. “제 임무는 무대 위에 있는 감정을 연주자에게 전달하는 게예요. 저 자리가 저만의 무대이자 배우 땀방울까지 보이는 VVIP석이에요. 시작은 늘 긴장돼요. 2~3초 심호흡하며 ‘집중하자’고 다짐합니다. 배우와 연주자, 스태프까지 눈동자 100개가 제 손끝만 바라보니까요.”
지휘석에서 본 무대는 수직의 벽처럼 가팔랐다. 김 감독은 “이곳에선 무엇보다 먼지와 싸워야 한다”며 “공연에 포그(fog·연기)가 나오면 내 입으로 돌진해오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기침이 나오면 ‘앞으로 열심히 살 테니 이 순간만 모면해달라’고 기도한다 했다. “공연 중 피트만 정전이 된 적이 있어요. 당황했지만 1분 동안 입으로 ‘원투스리포’ 카운트를 하며 저희들끼리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지요.”
같은 시각 서울 블루스퀘어. 뮤지컬 ‘위키드’는 오케스트라 피트(15x3m)에 16명이 들어가 음악을 채굴한다. 도로시가 오즈에 떨어지기 전에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 배우 옥주현과 정선아의 오랜 호흡이 돋보인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공연이 나아가게 하는 톱니바퀴이자 엔진이다. 객석에선 지휘자 뒤통수만 보이는데 지휘봉이 마녀 엘파바의 피부색처럼 초록빛이었다. 양주인 음악감독은 “내 손끝으로 결정해야 하는 큐가 1000개에 달하는데 ‘원 숏 데이’ 장면에서 무대 전체가 초록빛으로 바뀔 땐 마법봉을 든 기분”이라며 “음악이 없는 구간에선 앉아서 물을 마시며 숨을 돌린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와 거리 두기는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양 감독은 “빈집에 가면 소리가 크게 들리듯이, 관객이 적으면 작은 소리까지 더 크게 울려 모두 예민해진다”며 “대표곡이 ‘디파잉 그래비티(defying gravity·중력을 벗어나)’인데 날마다 ‘디파잉 코로나’를 열망하며 판타지를 만든다”고 말했다.
’맨 오브 라만차' 세션 중 퍼커션을 담당하는 박진명씨는 12년차다. “이 뮤지컬 대표곡 ‘이룰 수 없는 꿈'을 부를 때 마지막 감동을 위해 ‘저 별을 향하여~‘에서 탕! 힘을 실어준다”고 그는 말했다. 비좁은 공간에서 마스크도 못 쓰고 계속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관악기 연주자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일터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배우들을 빛나게 하는 손과 같다. “수면 아래 백조의 발구름처럼, 어둠 속에서 음악을 퍼올립니다. 그렇게 만든 값진 공연을 충분히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오후 2시, 김문정 감독에게 핀라이트가 떨어졌다. 관객을 돌아보며 그녀가 인사했다. 구덩이 속에서 첫 음악이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