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 맹추위를 뚫고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난달 30일 서울 자양동 어느 골목길. 간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서울사 세탁’이라 적혀 있었다. 외부는 여느 세탁소와 같았지만 내부로 들어서자 풍경이 달라졌다. 발레 ‘호두까기인형’ 무대의상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김연석(62) 사장이 손에 쥔 스팀다리미 아래로 ‘튀튀(tutu)’가 보였다. 흰색 나일론이나 얇은 모슬린 따위를 여러 장 겹쳐 만든 발레용 치마다. 이곳은 무대의상 전문 세탁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서울예술단 등에서 임무(?)를 마친 의상이 다음을 기약하며 ‘때 빼고 광내는’ 장소다.
연말 시즌 공연장에선 ‘왕자’가 실종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자 국립발레단도 유니버설발레단도 ‘호두까기인형’ 공연을 취소했다. 이 히트 상품 없는 크리스마스는 20여년 만이었다. 소셜미디어엔 “호두까기인형 없는 연말이라니 슬프고 안타깝다”는 글이 많았다.
발레단은 휴가에 들어갔다. 하지만 왕자를 비롯해 여주인공 마리, 마법사 드로셀마이어 등 ‘호두까기인형’ 의상들은 옷걸이에 이름표가 달린 채로 1t 트럭에 실려 이 세탁소에 도착했다. 무용수 24명이 눈송이처럼 춤추는 1막 ‘눈송이의 춤’, 화려한 질서를 보여주는 2막 ‘꽃의 왈츠’ 장면 속 의상도 사이 좋게 모여 있었다. 웅장한 차이콥스키 음악이 없는 게 아쉬웠다. 대형 드럼 세탁기 소음과 스팀다리미가 내뿜는 수증기가 작업장에 차올랐다.
김 사장은 무대의상만 다룬 지 10년이 넘었다. 그는 “무대의상은 장식이 많이 붙어 있는 데다 얼룩 제거, 냄새 제거, 표백 등이 대부분 수작업이라 일반 의상보다 10배 더 공이 들어간다”며 “튀튀는 발레리나가 입었을 때 공작새 깃털처럼 풍성하게 올라오도록 낱장마다 풀을 먹여 다린다”고 말했다. 탄내까지 뺄 수 있다고 자랑하기에 냄새 제거 요령을 묻자 영업 비밀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다만 화공약품 대신 음식을 이용한다고 귀띔했다.
‘호두까기인형’ 의상은 모두 180벌. 세탁은 1주일쯤 걸린다. 김인옥 국립발레단 의상감독은 “발레 의상은 섬세하고 고가(高價)인데 잘못 세탁하면 틀어지거나 망가진다”며 “지방 투어까지 다니면 땀을 많이 흘려도 바로 세탁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전문 세탁소로 보낸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활약하는 박세은 등 많은 발레리나에게 ’호두까기인형'은 어릴 적 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국립발레단 단원 5년 차는 “호두를 5번 깠다”고 말할 정도다. 발레리노 이영철(43)은 그 무대에서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에 막히고 말았다. 그는 “왕자로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어 준비를 많이 했다”며 “취소돼 아쉽지만 새해엔 안무가로 발레 인생 2막을 열 것”이라고 했다.
무대의상 세탁의 달인은 ‘호두까기인형’ 공연을 봤을까. 김 사장은 “저는 발레 감상할 줄 모른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 안주인이 나섰다. “볼 때마다 감동했어요. 짝사랑(?)하는 무용수도 있답니다. 저는 세탁도 ‘풀 죽지 않게 새 옷처럼 살려주는’ 창작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스팀다리미가 다시 힘차게 훈김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