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敵)이 분명하던 젊은 시절엔 생각했다. 불합리한 세상을 예술로 바꾸고 구원할 수 있다고. 내 연극 보고 거리로 뛰쳐나가 저항해도 좋다고. 그 생각은 유효기간이 길지 않았다.”
장진(50)은 잠시 뜸을 들였다. 충무로와 대학로가 사랑한 작가 겸 연출가. 어느덧 50 줄이 된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젠 끊임없이 나한테 요구한다. ‘우쭐대지 말고 너나 잘해’라고. 대의(大義)는 다 사라졌고 나는 소박해졌다.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이야기꾼이 돌아왔다. 연극 ‘얼음’(장진 작·연출) 개막을 앞둔 그를 지난달 31일 밤 대학로 어느 연습실에서 만났다. 배우들이 대사를 담금질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벽을 뚫고 넘어왔다.
-공연이 대부분 취소되는데.
“작은 연극이라 위험 부담이 작다. ‘얼음’(8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은 무대에 형사 두 명만 나온다. 그들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고 가는 18세 소년은 빈 의자로 등장할 뿐 보이지 않는다. 환영을 어떤 수준까지 만들 수 있는지 기술적으로 도전한다. 관객의 상상으로 완성되는 연극인 셈이다. 2016년에 초연했는데 더 세공하면서 오류를 바로잡고 싶어 다시 올린다.”
-어떤 오류인가.
“공연이 끝나고 ‘그래서 범인이 누구야?’라고들 물었다. 결말을 손질했다. 또 어느 대목에서 관객이 웃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면 내 계산이 잘못된 거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폐막할 때까지 수정이 가능하다. ‘얼음’은 90분 길이인데 70%는 모노드라마(1인극), 30%는 2인극 형식이다.”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뭔가. 제목은 왜 ‘얼음’인가.
“얼음은 물이 잠깐 얼어 있는 것이잖나. 녹아 형체 없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런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행복이나 사랑처럼 만질 수 없고 고정돼 있지도 않은데 사람들이 믿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소년 출연료는 굳었겠다.
“형사들이 대사를 버벅대도 괜찮다(웃음). 스케줄도 늘 좋고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연극성이 강한 연극이다.
“글쎄. 가장 중요한 소년은 보이지 않고 표현주의적 작품이긴 하다. 창작자로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확신이 없어졌다. 하면 할수록 명인이나 장인이 되는 게 아니라 벽과 만나고 고갈을 느낀다. 정반대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있게 말을 못하겠다.”
-미스터리와 코미디가 공존할 수 있나.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에서는 배우가 두 번 구르고 뭔 짓을 해야 웃길 수 있는데 이런 연극에선 살짝만 삐끗해도 웃음이 터진다. 편한 오락물과는 결이 다르다.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
-정웅인 박호산 이철민 김선호 등 바쁜 배우들을 어떻게 모았나.
“캐스팅을 내가 하지는 않았다. 정웅인은 연극 무대가 ‘고프다’고 하더라.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대사 한 줄 붙잡고 캑캑대면서 몇 시간 씨름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안전장치 없이 몸을 던져도 좋을 무대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다들 임자 같고 좋다. (어떤 광대를 좋아하는지 묻자) 싸고 잘하면 되지. 하하하.”
-관객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 배우가 무대에서 만들어내는 불꽃 튀는 에너지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주는 신선함, 즐거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큰 성공도 맛봤고 참담한 실패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라면.
“무조건 ‘겸손하자’다. 이곳엔 면허증도 정년도 없다. ‘천만 감독’이라고 계속 흥행한다는 보장도 없다. 나는 결국 ‘오늘 뭘 만들 수 있느냐’로 돌아오게 됐다. 우쭐대는 박수도 받아봤고 최악의 난도질도 겪으면서 과거의 영광이나 ‘이 바닥에서 난 몇 년 차야’ 같은 계급장은 버렸다. 성공을 모방하는 게 가장 바보 짓이다.”
-코로나를 뚫고 공연하는 각오는.
“악조건이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더 고단한 관객을 만나야 한다. 배우들에게 ‘어디 가서 우는소리 하지 말자’고 했다. 남들이 보면 ‘우린 밥 먹고 사는 놈들’이다. 지금 자영업자, 소상공인은 얼마나 힘든가. 그런 분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겠다고 만든 연극이니, 우리가 징징대면 안 된다.”
이 겨울에 장진은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고 있다. 관객에게 건넬 말을 청하자 “역사 속에서 가장 힘겹고 암담한 한 해가 끝났다. 덕분에 우리는 인류 최고의 존재라는 자만심을 버릴 수 있었고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됐다”며 그가 덧붙였다. “관객에게 표 값과 수고가 헛되지 않은 연극일 수 있는가가 지금 내 유일한 걱정이다.”
▶장진은?
조선일보 신춘문예(희곡)로 등단. 인물을 만들 때 혈액형, 본적, 주민번호까지 짠다. 연극 ‘택시 드리벌’ ‘박수칠 때 떠나라’, 영화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가 대표작. 시나리오를 쓴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643만 관객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