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 운동권이던 장진은 군 복무 중 군사정권의 폐막을 목격하면서 코미디에 매력을 느꼈다. “언젠가부터 세계관이 ‘내가 잘하면 사회는 조금씩 나아진다’로 바뀌었다. 좋은 연극은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를 다 웃기고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적(敵)이 분명하던 젊은 시절엔 생각했다. 불합리한 세상을 예술로 바꾸고 구원할 수 있다고. 내 연극 보고 거리로 뛰쳐나가 저항해도 좋다고. 그 생각은 유효기간이 길지 않았다.”

장진(50)은 잠시 뜸을 들였다. 충무로와 대학로가 사랑한 작가 겸 연출가. 어느덧 50 줄이 된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젠 끊임없이 나한테 요구한다. ‘우쭐대지 말고 너나 잘해’라고. 대의(大義)는 다 사라졌고 나는 소박해졌다.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이야기꾼이 돌아왔다. 연극 ‘얼음’(장진 작·연출) 개막을 앞둔 그를 지난달 31일 밤 대학로 어느 연습실에서 만났다. 배우들이 대사를 담금질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벽을 뚫고 넘어왔다.

-공연이 대부분 취소되는데.

“작은 연극이라 위험 부담이 작다. ‘얼음’(8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은 무대에 형사 두 명만 나온다. 그들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고 가는 18세 소년은 빈 의자로 등장할 뿐 보이지 않는다. 환영을 어떤 수준까지 만들 수 있는지 기술적으로 도전한다. 관객의 상상으로 완성되는 연극인 셈이다. 2016년에 초연했는데 더 세공하면서 오류를 바로잡고 싶어 다시 올린다.”

충무로와 대학로가 사랑한 이야기꾼 장진.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어떤 오류인가.

“공연이 끝나고 ‘그래서 범인이 누구야?’라고들 물었다. 결말을 손질했다. 또 어느 대목에서 관객이 웃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면 내 계산이 잘못된 거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폐막할 때까지 수정이 가능하다. ‘얼음’은 90분 길이인데 70%는 모노드라마(1인극), 30%는 2인극 형식이다.”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뭔가. 제목은 왜 ‘얼음’인가.

“얼음은 물이 잠깐 얼어 있는 것이잖나. 녹아 형체 없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런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행복이나 사랑처럼 만질 수 없고 고정돼 있지도 않은데 사람들이 믿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소년 출연료는 굳었겠다.

“형사들이 대사를 버벅대도 괜찮다(웃음). 스케줄도 늘 좋고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연극성이 강한 연극이다.

“글쎄. 가장 중요한 소년은 보이지 않고 표현주의적 작품이긴 하다. 창작자로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확신이 없어졌다. 하면 할수록 명인이나 장인이 되는 게 아니라 벽과 만나고 고갈을 느낀다. 정반대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있게 말을 못하겠다.”

장진이 쓰고 연출한 연극 '얼음'. 정웅인 이철민 박호산이 형사1, 이창용 신성민 김선호가 형사2를 나눠 맡는다. 그들이 취조하는 소년은 관객이 형사들의 연기를 통해 상상해야 한다. /파크컴퍼니

-미스터리와 코미디가 공존할 수 있나.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에서는 배우가 두 번 구르고 뭔 짓을 해야 웃길 수 있는데 이런 연극에선 살짝만 삐끗해도 웃음이 터진다. 편한 오락물과는 결이 다르다.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

-정웅인 박호산 이철민 김선호 등 바쁜 배우들을 어떻게 모았나.

“캐스팅을 내가 하지는 않았다. 정웅인은 연극 무대가 ‘고프다’고 하더라.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대사 한 줄 붙잡고 캑캑대면서 몇 시간 씨름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안전장치 없이 몸을 던져도 좋을 무대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다들 임자 같고 좋다. (어떤 광대를 좋아하는지 묻자) 싸고 잘하면 되지. 하하하.”

-관객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 배우가 무대에서 만들어내는 불꽃 튀는 에너지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주는 신선함, 즐거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큰 성공도 맛봤고 참담한 실패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라면.

“무조건 ‘겸손하자’다. 이곳엔 면허증도 정년도 없다. ‘천만 감독’이라고 계속 흥행한다는 보장도 없다. 나는 결국 ‘오늘 뭘 만들 수 있느냐’로 돌아오게 됐다. 우쭐대는 박수도 받아봤고 최악의 난도질도 겪으면서 과거의 영광이나 ‘이 바닥에서 난 몇 년 차야’ 같은 계급장은 버렸다. 성공을 모방하는 게 가장 바보 짓이다.”

-코로나를 뚫고 공연하는 각오는.

“악조건이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더 고단한 관객을 만나야 한다. 배우들에게 ‘어디 가서 우는소리 하지 말자’고 했다. 남들이 보면 ‘우린 밥 먹고 사는 놈들’이다. 지금 자영업자, 소상공인은 얼마나 힘든가. 그런 분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겠다고 만든 연극이니, 우리가 징징대면 안 된다.”

이 겨울에 장진은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우고 있다. 관객에게 건넬 말을 청하자 “역사 속에서 가장 힘겹고 암담한 한 해가 끝났다. 덕분에 우리는 인류 최고의 존재라는 자만심을 버릴 수 있었고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됐다”며 그가 덧붙였다. “관객에게 표 값과 수고가 헛되지 않은 연극일 수 있는가가 지금 내 유일한 걱정이다.”

1월 8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하는 연극 '얼음'을 연출한 장진 감독을 만나다.

▶장진은?

조선일보 신춘문예(희곡)로 등단. 인물을 만들 때 혈액형, 본적, 주민번호까지 짠다. 연극 ‘택시 드리벌’ ‘박수칠 때 떠나라’, 영화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가 대표작. 시나리오를 쓴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643만 관객을 모았다.

연극 '얼음'을 쓰고 연출한 장진. 옆에 보이는 의자가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