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에 맞서 전공의 파업사태가 벌어진 지 한 달이 넘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에 따르면, 지난 3월 18일 기준으로 전국 98개 수련병원 소속 전공의 9929명 중 3.1%에 해당하는 308명만이 현재 병원에서 근무 중이다. 전공의들에 의존해 온 이른바 ‘빅5’ 병원을 위시한 서울의 대형병원들은 병상 가동률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한데 정부가 지난 3월 20일 의대 정원 배정을 발표해 ‘2000명’이라는 숫자를 못박으면서 전공의 파업은 좀처럼 대화의 문이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오는 3월 25일 ‘빅5’ 병원과 연계된 서울대와 연세대 의대 교수들이 일제히 집단사직 할 것을 결의하는 등 ‘의료대란’이 닥칠 것이란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의료대란’이 목전에 닥쳐왔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의 중재노력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주요 책무 중 하나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다지기에 바쁜 여야 후보들은 중재에 나서봤자 양 진영으로부터 욕만 먹을 것이 뻔한 전공의 파업 중재를 외면하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 중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어 의료현장을 비교적 잘 이해한다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도 예외가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의사 면허를 가진 국회의원은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이용빈·신현영 의원(비례) 등 모두 3명이다. 이 중 광주 광산구갑이 지역구인 이용빈 의원은 지난 3월 6일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지난 총선 때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신현영 의원도 불출마한다. 이용빈·신현영 두 의원은 비록 의사 면허를 가졌다고는 하나, 야당인 데다 아직 초선이라 여야와 대통령실을 넘나드는 중재력을 발휘하기에 미흡한 측면이 있다. 민주당 신동근 의원의 경우 재선이지만 전공의 파업과는 조금 동떨어진 치과의사 면허 소지자고, 지난 3월 13일 민주당 공천에서도 탈락했다.
반면 2022년 6월 재보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안철수 의원은 의사 면허를 가진 현역 의원 3명 중 22대 총선을 통한 생환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평가다. 서울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안철수 의원은 단국대 의대 전임강사로 의예과 학과장을 지냈다. 또 해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지난 코로나19사태 때는 국민의당 대표로서 부인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법의학)와 함께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검체채취 등 자원봉사를 자처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안철수 의원은 두 차례나 대선에 도전했던 3선 중진 의원이다. 2022년 대선 때는 막판에 대선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고, 윤석열 정부 출범에 앞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사태 때 ‘의사 안철수’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안철수 의원은 전공의 파업사태가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와중에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여느 정치인처럼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성남 분당갑에서 지역주민들과 대면접촉을 늘리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2013년 철도파업 때 김무성 활약
자연히 정치권과 의료계 일각에서는 “안철수 의원이 과거 철도파업 사태 때 ‘무대(김무성)’와 같은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없느냐”는 아쉬움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12월 9일부터 30일까지 약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철도파업 사태 때 독자적인 중재안을 마련해 철도파업 해결에 물꼬를 튼 김무성 전 의원을 안철수 의원과 비교하는 목소리다.
2013년 12월 당시 박근혜 정부가 ‘철도 경쟁체제’ 도입을 목표로 수서발 고속철(SRT)을 운영할 자회사(현 SR)를 설립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철도노조는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철도파업으로 KTX는 감축운행에 돌입했고, 정부는 기관사 면허를 가진 군 장병과 한국교통대 학생들을 열차 운행에 투입했다. 철도파업 와중에 크고 작은 탈선사고도 빈발했다.
하지만 철도노조 파업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최연혜 한국철도공사 사장(현 한국가스공사 사장)의 원칙대응 방침에 따라 철도파업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 지도부였던 황우여 대표와 최경환 원내대표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강경대응 방침에 힘을 실었다.
결국 같은해 12월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있던 박기춘 의원과 막후 채널을 가동해 ‘국회에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조건으로 철도파업 해결의 물꼬를 텄다. 김무성 의원은 황우여 당시 대표로부터 협상 전권을 부여받고,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등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12월 30일 새벽 1시경 극적으로 파업을 타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김무성 의원의 개입을 두고 “파업동력이 약화되는 와중에 숟가락을 얹었다”는 여권 내의 비판도 나왔지만, “여야 정치권이 협상력을 발휘해 사회갈등을 중재했다”는 찬사도 쏟아졌다. 그 결과 김무성 의원은 이듬해인 2014년 7월 열린 전당대회에서 친박계 서청원 전 의원을 꺾고 새누리당 당권을 장악하는 데도 성공했다.
안철수, 전공의 파업에 원론적 입장만
김무성 전 의원에 비해서도 결코 정치적 무게감이 적지 않은 안철수 의원이 전공의 파업사태 와중에 공식 입장을 표명한 것은 한 달 전인 지난 2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집단행동은 중단하고, 의대 증원 규모는 정교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 정도다. 당시 안철수 의원은 “의사이자 정치인으로 두고만 볼 수 없어 의료대란을 막고 올바른 의료개혁을 위한 고언을 드린다”며 “대화를 통해 의료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만큼 의대 정원을 단계적으로 늘리는 것이 답”이란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의원이 전공의 파업사태와 관련해 적극적 입장표명을 꺼리는 이유를 두고서도 여러 얘기들이 나온다. 지난해 3월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봤듯이 아직 당내 입지가 취약한 안철수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의 의대 정원 확대방침에 맞서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당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이른바 ‘윤심’을 업고 당 대표로 선출된 김기현 의원과 맞선 안철수 의원은 23.37%의 표를 얻어 2위에 그쳤다.
국민의힘 공천에서도 이른바 ‘안철수계’로 불리는 이태규 의원(비례)이나 김도식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공천장을 받는 데 모두 실패했다. 공천장을 받은 사람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안철수 캠프 선대위원장을 맡아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에서 해촉됐던 김영우 전 의원(서울 동대문구갑) 정도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안철수 의원은 나경원 전 의원, 원희룡 전 장관, 윤재옥 원내대표 등과 함께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고 있어 윤석열 대통령의 의대 증원 방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기에도 운신의 폭이 좁다”고 지적했다.
최근 전공의 파업사태 장기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주호주대사 임명, 황상무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회칼테러’ 발언으로 인한 수도권 표심 악화로 지역구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얘기도 나온다. 민주당은 안철수 의원의 지역구인 성남 분당갑에 3선 국회의원에 강원도지사까지 지낸 대표적 친노(親盧) 인사인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을 전략공천했다.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나선 안철수 의원과 민주당 이광재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