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한 장 28. 이탈리아 사진가 루이지 기리 사진전

빙하가 녹은 호수 안내판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사람들의 머리 색과 옷들이 절묘하게 그림과 같은 색으로 어울리며 실제 풍경을 보는 착각이 든다. 기리는 절대로 대비가 강한 한낮 시간을 피해서 자연광에서 촬영했기에 이런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다. Salzburg, f11, 1125, Natural Light series, 1977, C-print, 24×35.5cm, © Heirs of Luigi Ghirri

여행객 네 명이 호수의 풍경을 보고 있다. 아니다. 다시 보니 실제 풍경이 아닌 풍경을 묘사한 그림, 정확히는 등산 코스 안내도를 보고 있다. 왜 착각했을까? 여성들로 보이는 여행자들의 갈색 머리카락과 빛바랜 그림의 산과 색이 비슷하고, 오른쪽 두 명이 입은 재킷도 호수의 물색과 비슷하다. 이탈리아 사진가 루이지 기리는 1977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몬트제 빙하 호수를 안내하는 그림 앞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이 알쏭달쏭한 사진의 의미는 뭘까?

볼로냐의 한 식당 벽에 그려진 파도 그림. 아래 테이블에 무료한 표정의 손님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Bologna, f11, 1125, Natural Light series, 1973, C-print, 23.8×34.8cm, © Heirs of Luigi Ghirri

서울 종로구 뮤지엄한미 삼청에서는 현재 이탈리아 사진가 루이지 기리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루이지 기리는 흑백 사진이 세계 사진계의 주류였던 1970년대에 미국 사진가 윌리엄 이글스턴과 함께 컬러 사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했다. 거창한 행사나 아름다운 풍경을 찾기보다 소형 필름 카메라로 일상에서 사실을 묘사한 그림, 거울, 사진, 지도 등을 이용해서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묘사된 풍경인지 의미가 모호한 사진들을 많이 찍었다.

스위스 휴양지 엥겔베르크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담 너머 알프스 산들이 보이고 스프라이트 광고 사진은 마치 빙하에서 녹은 폭포처럼 보인다. Engelberg, Kodachrome series, 1972, C-print, 21.8×14cm, © Heirs of Luigi Ghirri

기리가 이런 사진들을 찍게 된 계기는 그가 사진가로 활동하기 전에 파르미잔니, 바카리 등과 같은 이태리 개념미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사진으로 사실적 순간을 포착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찾기보다 사진을 통해 ‘보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면서다. 개념미술에 대해 잠깐 설명하면 작품의 아름다움보다 작품에 담긴 생각이 중요하다고 시작된 미술 사조로, 1917년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이 남자 소변기를 갖고 와서 ‘R. Mutt’라고 서명한 뒤 전시장에서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뒤샹은 “예술가가 직접 만들지 않았어도 그것을 선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리의 사진들은 이렇게 극단적인 개념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담에 붙은 레몬 나무 광고 사진 뒤로 목련 꽃이 활짝 핀 나무가 보인다. 찢어진 사진의 일부라는 것이 아니라면 나무가 물에 반사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Modena, Kodachrome series, 1973, C-print, 20×14cm, © Heirs of Luigi Ghirri
그림 위에 반사된 유리의 일부가 마치 푸른 하늘이 그려진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기리는 이렇게 광선에 의해 반영된 이미지를 즐겨 찍었다. Modena, Still Life series, 1978, C-print, 36×24.6cm, © Heirs of Luigi Ghirri

무엇보다 빛을 적절히 통제하고 강조하면서 절제된 구도와 균형을 추구하는 사진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그 안에서 평범한 풍경 안에서 사진 감상자들에게 ‘보는 방법’에 대해 질문한다. 전시에 걸린 많은 사진을 보면 가볍고 재밌다. 지도를 밟고 있는 누군가의 발은 마치 거인의 발이 나라를 덮친 것만 같다. 미켈란젤로의 걸작 다비드상 사진이 바닥에 인쇄된 재떨이 위로 버려진 담배꽁초들은 이 아름다운 조각을 가차 없이 고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식당 벽에 걸린 파도 그림은 바로 앞 테이블로 쏟아져 내릴 듯이 보이지만 테이블 아래 남녀는 무료한 표정으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폭포가 그려진 음료수 광고판은 멀리 눈덮힌 알프스 산들이 마치 실제 풍경처럼 보인다. 관람객들이 보는 유화는 오히려 그림 속 인물들이 액자라는 창문에서 관람객을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이 서린 창문 밖으로 눈 덮힌 산과 사람들의 풍경이 보일 듯 말듯 하다.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풍경들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세상의 조각이라고 사진은 말한다. Grostè Refuge, Italian Landscape series, 1983, C-print, 21.5×35cm, © Heirs of Luigi Ghirri
조리지오 모란디의 화실 풍경,. 기리는 어떤 연출이나 보조 조명 없이 화가들의 물건들이 배치된 스튜디오를 즐겨 촬영했다. Bologna, Studio of Giorgio Morandi series, 1989-1990, C-print, 19.5×24.2cm, © Heirs of Luigi Ghirri

기리의 사진들은 이렇게 사람들의 착시를 불러오고 그래서 사진을 다시 천천히 보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이 실제이고 실제가 아닌지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기리는 “사진은 세상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거울”이라고 했다. 플래시 같은 보조광을 거부하고 실내에서도 자연광을 촬영하기를 좋아했던 그의 사진 세계는 몇 년 전 국내에 출간된 ‘루이지 기리의 사진 수업’이라는 책을 통해 알려졌다.

1969년 12월 24일 공개된 달착륙탐사선 아폴로8호 우주인이 촬영한 지구 사진, 이전에도 흑백사진은 공개되었으나 지구의 첫 컬러 사진은 이 사진이다. 루이스 기리는 이 사진을 본 후 자신의 사진 방향을 바꾸었다./ NASA

책 말미에 잔니 첼라티라는 소설가가 덧붙인 글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기리는 늘 자기 사진의 출발이 된 계기를 1968년 달 착륙 우주선(아폴로 8호)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이었다고 했다. 이때 인류는 지구 전체의 이미지를 처음 보게 되었다며, 하나가 된 세계의 모습은 이미 알려졌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기리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기리는 소형 올림푸스 카메라로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을 찍겠다고 마음먹고 무한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대상, 단일화에서 벗어난 모든 대상에 흥미를 느끼며 촬영했다고 서술했다.

벽과 벽이 가로막은 사이 뒤로 산이 보인다. 추상화가 아닌 현실 세계이지만 로스코의 그림처럼 구도를 잡아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촬영했다. Ile Rousse, Kodachrome series, 1976, C-print, 17×27cm, © Heirs of Luigi Ghirri

전시는 3월 15일까지. 사진=뮤지엄한미 삼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