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한 장 27. 필립 퍼키스 회고 사진전

겨울 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한 마리, 가볍고 신중해 보인다. 요란한 계절을 보내고 자유로워진 나무 꼭대기에서 중심을 잡는 듯 하늘과 땅 사이에 앉아 있다. /필립 퍼키스, '노탄' 연작 중

다시 새해. 리셋(Reset) 버튼을 누르고 다시 새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작년 말엔 힘이 좀 들었다. 몸이 어딘가 고장 나서 수술했고 바로 퇴원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더 놀라고 걱정했다. 몸이 삐걱거리는 동안 생각해보니 그동안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만나던 자신감들은 건강 걱정을 한 적이 없는데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몸이 힘들면 모든 게 끝이구나 하는 생각도...

작년엔 많은 배우와 유명인이 세상을 떠났다. 윤석화, 김지미, 전유성, 이순재, 로버트 레드퍼드, 제인 구달,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지난 11월 작고한 필립 퍼키스도 있다.

필립 퍼키스가 누구지? 라고 물을 수 있지만 유명한 책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는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 뉴욕 프랫 대학원에서 40년간 사진을 가르친 필립 퍼키스는 사진가들의 사진가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사진가를 지도한 필립 퍼키스를 위해 제자 50명이 모여 2023년에 그룹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 류가헌에선 요즘 필립 퍼키스가 발표한 사진들을 모아 회고 전시를 하고 있다.

눈 덮힌 언덕 위 기울어진 창고 앞에서 개 한마리가 신나게 뛰고 있다. 개의 활기찬 움직임과 창고의 사선 구도가 조화를 이루면서도 하얀 눈을 배경으로 했기에 강렬한 시각적 대비까지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필립 퍼키스, '인간의 슬픔' 연작

전시장을 찾아 사진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책꽂이 안쪽에 서있던 그의 책을 펼쳐 보았다. 사물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태도와 깊은 사유가 담긴 에세이였다. 가장 공감하는 대목은 이것.

“이제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볼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은 예민한 레이더가 되어 모든 상황에 적극 반응할 것이다. 내용이나 의도는 고려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상황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 나는 약간의 행운과 더불어 내 의도가 사진 찍는 행위와 일치될 수 있는 열린 상태를 맞게 된다.”

선물용 상품을 케이크 모형으로 꾸미는 쇼윈도 안 남자의 일하는 표정이 어둡다. 어떤 행복을 위해 누군가는 슬픔 속에서 살고 있다. /필립 퍼키스, '인간의 슬픔' 연작

사진가들이 카메라를 들고 길을 떠날 땐 무엇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막연함이 앞선다. 사실 찍을 대상이 보일 때보다 안 보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막연한 걱정을 뒤로 하게 하는 건 대책없는 기대감. 카메라를 잡은 눈을 믿으면 아무것도 아닌 풍경에서도 셔터를 누를 대상이 보인다. 마주한 빛과 사물이 의외의 모습으로 펼쳐진다. 사진을 시작해서 20년쯤 되었을 때 느낀 것은 카메라는 특이하고 화려한 모습보다 사소하고 어두운 쪽과 더 잘 어울린다는 것. 퍼키스의 글은 그런 사진들을 설명하고 보여주고 있었다.

옥수수 밭 사이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필립 퍼키스, '옥타브' 연작 중
한 남자가 바닷가를 등지고 자신의 신발을 들어 보는 동안 옆에 개 한 마리가 편안한 자세로 바다를 보고 앉아 있다. /필립 퍼키스,'옥타브' 연작

필립 퍼키스는 생전에 새로운 곳을 찾거나 새로운 풍경들을 찾아다니는 방법으로 사진을 찍지 않았다. 미국 뉴욕주 스토니포인트에 살던 사진가는 집에서 가깝게 걸어서 갈 수 있는 숲을 찾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저 예술처럼 보이는 그럴싸한 사진을 만드는 데 죽은 힘을 다해 애쓰는 대형 사진들’을 거부하고, 조용히 암실로 들어가서 작업했다. 스스로 사진 인화(프린트)를 사색적인 작업이라고 했다. 전시장엔 퍼키스의 사진에 대한 생각과 작업 모습, 학생을 지도하는 모습 등이 담긴 9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도 공개되었다. 모든 사진을 흑백 필름으로만 찍고 직접 암실에서 프린트한 사진가는 35㎜ 단렌즈에, 아날로그 흑백 필름으로 일일이 자신의 손을 거쳐 간 사진들만 책이나 전시에 공개했다.

싸구려 물건들이 걸려 있는 가게 옆에 한 소녀가 앉아 있다. /필립 퍼키스, '멕시코' 연작

뉴욕 프랫 대학원에서 필립 퍼키스의 강의를 직접 듣고 사진가로 살아온 박태희 사진가는 실제로 교수와 제자로서 누굴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진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모든 강의는 학생들이 알아서 찍어온 것으로 시작했다. 주제는 언제나 학생 스스로 정하는 자유 주제였고, 품질이 좋지 않은 무성의한 프린트로 사진을 가져오면 알기 쉽게 비유를 해가면서 학생 스스로 다시 완성해서 갖고 오게 했다고 한다.

눈보라 속 겨울 숲, 그 안에 흐릿한 나무들, 누구나 어둡고 외로운 시간이 있다. 왼쪽 눈이 실명되고 초점이 맞지 않자 우울했던 사진가는 3개월 후 다시 자동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필립 퍼키스, 노탄 연작 중

파인더를 보던 왼쪽 눈이 시력을 상실해가며 더 이상 라이카 렌즈의 초점을 맞추지 못한 2007년 퍼키스는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사진을 찍지 않았다. 3개월 후 작은 자동 카메라(Contax T3)의 파인더를 오른쪽 눈으로 보면서 다시 작업을 시작한 것이 ‘해질녘(At Twilight)’이라는 연작 사진들. 건강을 잃는 좌절감을 느낀 후 다시 돌아와 찍은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이전 작업보다 훨씬 깊고 자유로웠다. 작년에 잠시 힘들었던 내게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그의 말대로 “어떤 끈이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전시는 1월 11일까지.

텅빈 광장에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꽃을 파는 상인들 /필립 퍼키스, '멕시코' 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