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25전쟁 바로 전해입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침, 즉 자신들의 표현으로는 ‘남조선 해방·통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걸림돌은 주한미군이었습니다. 소련은 1948년말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이제 미군도 나가라고 압박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남한의 공산세력이 미군 철수를 강경하게 요구했습니다. 여기에 국회의원들이 포섭된 사건이 바로 국회 프락치사건입니다.
국보법 제정으로 불법단체가 돼 설 곳이 없어진 남로당이 이른바 합법투쟁에 나서 1948년 5월 출범한 대한민국 초대 국회, 제헌의회를 뒤흔든 것입니다. 프락치는 러시아어로 간첩입니다. 프락치 공작의 한 갈래는 하사복이라는 가명을 쓴 공작원 이삼혁을 통한 남로당계, 한 갈래는 변장한 모습을 김일성조차 못 알아봐서 전설적 간첩으로 알려졌고, 6.25 전에 붙잡혀 사형에 처해진 북한 공화국 영웅 1호 성시백을 통해 북로당계가 주도했습니다.
남로당계 이삼혁은 1948년 12월에 남파돼 국회 소장파 중심인물인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 노일환과 이문원을 포섭해 1949년 2월 남로당에 가입시켰습니다. 첫번째 지령은 바로 국회에 미군 철퇴(철수)안을 상정하고, 유엔 한국위원회에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진언서를 제출하고, 찬성하는 의원 100명을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일환, 이문원과 함께 이 공작의 중심인물이 된 사람이 당시 국회 부의장 김약수였습니다. 본명이 김두전인 김약수는 1925년 4월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거물이었으나 해방 후 건준에서 박헌영과 대립하고 결별했습니다.
이들은 지령대로 미군 철수안을 두 번 국회에 상정했지만 모두 부결됐고, 대신 3월까지 유엔 한국위원회 진언서 제출, 200명의 제헌의원 중 62명의 의원들의 미군 철수 연판장 서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결국 미국은 결국 1949년 6월 30일, 군사고문단 487명만 남기고 4만 5천 병력이 한반도에서 철수합니다.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이 어느 정도 해결됐다는 판단 아래 철군을 결정한 것이지만 국내외의 철수 압박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때 미군이 철수하지 않았다면 무려 5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비참한 비극 6.25 남침이 그렇게 쉽게 가능했을까요.
남로당의 교묘하고 집요한 국회 프락치 공작이 발각된 것은 1949년 4월 서울시경 사찰과가 충무로에 있던 남로당 특수조직부 아지트를 찾아내 급습한 결과 ‘주주총회보고서’라는 문서를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암호로 표시된 ‘주주’들의 활동상황과 평가가 담겨 있었는데 수사팀이 천신만고 끝에 암호를 해독한 결과 주주 명단은 놀랍게도 국회의원 30명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문서를 단서로 오제도 검사와 김호익 총경은 김약수,노일환,이문원,김옥주 네 명 의원이 이삼혁과 접선했고, 그 뒤에는 박헌영의 비서 박시현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포목 장수로 가장해서 개성을 드나들던 정재한이라는 여성이 해주에 있던 박헌영에게 보내는 암호 문서를 전달하는 레포(연락책)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사건 실체가 드러나자 남로당은 1949년 8월 12일 이 수사를 총괄하고 있던 전설적 대공 수사관 김호익 총경(추서된 계급)을 서울시경 별관 집무실에서 권총으로 암살하면서 수사를 저지하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국회의원 13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15차례 공판 끝에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항소심 재판 진행 중 6.25 전쟁이 일어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온 국회 프락치사건 관련 의원들은 대부분 월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1990년대까지도 박원순 변호사를 비롯한 좌파 진영에서 제기됐습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반민특위에 적극적이었던 의원들이 이승만 정권의 조작으로 이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반민특위가 해체됐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조작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는 역설적으로 북한 정권이 제공했습니다. 1997년 5월 26일 노동신문이 전설적 간첩 성시백을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여기에 ‘성시백 동지가 1948년 가을부터 남조선 괴뢰 국회 공작에 나서 국회 부의장과 수십 명 국회의원들을 포섭해 미제와 남조선 괴뢰를 수세에 몰아넣었다’고 스스로 공개한 것입니다.
조작설의 또 다른 근거는 여성 공작원 정재한이 공판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령인물이라고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재한은 체포 당시 주요 일간지에 사진까지 실렸고 기자들이 목격한 인상착의까지 공개됐습니다. 나중에는 재판기록까지 낱낱이 공개되면서 이런 주장도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월북한 국회 프락치 의원들은 1953년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할 때 남로당계로 몰려서 숙청됐고 대부분 벽지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 해체가 힘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체제 전복 위기 속에 대공 조직 붕괴를 막기 위해 우선 공산당과의 싸움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반민특위를 해체한 것 아니라 당시 제헌의회 재적의원 155명 중 105명, 2/3 이상의 찬성으로 해체 결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설령 국회 프락치사건이 반민특위 해체에 영향을 줬다고 해서 분명히 존재한 국회 프락치 공작을 없던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박헌영은 1949년 4월 남조선 전 당원을 동원해 수류탄 만 개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남조선을 해방하라는 최후 발악에 가까운 지령을 김삼룡에게 내렸지만 수류탄 등 무기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지령 달성에 실패해 평양 소환령이 내려진 남로당 거물 홍민표는 핵심간부들을 줄줄이 회유해 함께 자수해 버렸습니다. 이어 10월 정부의 특별자수기간에는 남로당원 수십 만명이 자수했고, 1950년 3월 특별공작원 196명이 체포되고 거물 김삼룡,이주하까지 붙잡히면서 남로당은 궤멸됐습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한에 쳐들어가기만 하면 남로당원들이 봉기해 남한은 곧바로 무너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남로당 조직이 전쟁 직전까지 사실상 붕괴됐기 때문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11월 두 사람은 만포진에서 이 문제로 심한 언쟁을 벌였습니다. 휴전 직후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미 제국주의 간첩으로 몰려 비참하게 숙청당했고 1956년 56세로 총살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