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로당의 피난처가 된 ‘국방경비대’
1946년 1월 미군정이 창설한 국방경비대(당시 명칭 남조선경비대)는 국군의 전신입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9월에 대한민국 육군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1946년 박헌영의 남로당이 폭력전술로 전환한 뒤 미군정과 경찰에 쫓기는 남로당원들이 많아지자 박헌영은 국방경비대를 이들의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처음에 미군정은 경찰력만으로 치안 유지가 힘들었기 때문에 신체검사와 구두시험만으로 국방경비대 신병을 뽑았습니다. 그래서 남로당원들에게 국방경비대는 쉽게 정치적 피난처가 됐습니다.
남로당 핵심당원들은 조직적으로 군에 들어갔고 적극적으로 세포를 확장했습니다. 밤마다 공산주의를 학습하고 토론하는 부대도 있었고, 주말 남로당 집회에 장교가 사병을 인솔하고 참석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아예 1연대는 연대 표어를 ‘불편부당’(우리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느 당도 아니다)로 정했는데 ‘우리는 공산당이 아니지만 공산당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런 셈이죠. 거듭 말씀드리지만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될 때까지 공산당, 즉 남로당은 불법단체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했던 것이죠.
- 다시 불붙는 제주 4.3사건
1948년 4월 제주 4.3사건이 시작됩니다. 5.10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남로당의 무장투쟁이죠. 6월에는 남로당의 무장투쟁을 진압하던 제주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부대 내 남로당원들이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 이후 대대적 진압작전으로 수세에 몰리자 1대 제주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은 깊은 산 속에 숨어 있다가 8월 탈출해서 월북합니다. 당시 인민유격대, 즉 남로당원들은 북한 인민군이 곧 내려와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남한이 해방될 걸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간 김달삼은 소식도 없었습니다.
뒤를 이은 2대 사령관이 이덕구입니다. 일본 육군 소위 출신으로 해방 후 제주도에서 학교 교사를 하던 인텔리입니다. 인민유격대는 이덕구의 지휘 아래 9월부터 다시 제주도를 전시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마을로 내려와서 우익 청년과 양민들을 학살했고 경찰서를 습격해서 경찰관들을 살해, 납치했습니다. 국군,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장병들이 전사하고 부상당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5연대, 6연대, 9연대의 각 1개 대대, 그리고 해군과 경찰대를 사령부에 배속시켰습니다.
당시 국군에는 아직 사단이 없고 대략 ‘1개 도에 1개 연대’ 원칙으로 10여개의 연대가 있었는데 주둔한 지역 이름으로 광주 4연대, 제주 11연대, 여수 14연대 식으로 불리웠습니다. 추가로 여수 14연대에도 1개 대대를 제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여수14연대 반란사건,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 여수14연대는 어떤 부대?
여수14연대의 배경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광주에 주둔하던 4연대는 남로당계가 특히 득세하던 부대였습니다. 정부 수립 전 경찰과 국방경비대는 앙숙이었는데, 당시 국방경비대는 경찰력의 부족을 보완하는 경찰 예비대 성격이었고, 인력 수준도 대체로 경찰이 더 높았습니다.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무시했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이 친일이라고 경멸했습니다. 국방경비대에 좌익 세력이 많이 침투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사망자까지 발생한 사건이 47년 6월 1일 영암 군경충돌사건인데, 이 부대가 바로 광주4연대입니다. 그리고 1948년 여수 14연대가 창설될 때 광주 4연대의 인력이 주축이 됐고, 그때 4연대의 남로당 장교, 하사관들이 14연대로 대거 이동합니다. 그래서 14연대에는 인사과 선임하사인 상사 지창수, 육사3기인 중위 김지회, 홍순석 등 남로당원들이 많았고, 남로당원들끼리도 하사관과 사병, 그리고 장교는 포섭 경로가 달라서 서로 정체를 몰랐다고 합니다.
- 운명의 1948년 10월 19일
마침내 14연대 1대대에 1948년 10월 19일 화요일 밤 8시 여수항을 출발해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하달됩니다. 군 자체 통신시설이 미비한 상태라 일반전보를 통해 여수우체국으로 명령이 하달됐는데 여수우체국 직원인 남로당원이 이 사실을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보고했고, 차례로 남로당 전남도당 책임자 김백동,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 남로당 빨치산 군사책 이중업에게 전달됩니다. 이 내용은 1967년 국방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군내 반란시기를 저울질해왔던 이중업은 이재복을 통해 지창수 상사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명령했습니다. 일단 거사에 성공하면 전투 지휘는 장교인 14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 순천 주둔부대 선임중대장 홍순석 중위가 맡으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 내용은 1988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대비정규전사에 기록된 것입니다.
1대대 출동을 앞두고 장교 30여명이 장교식당에 모여 환송 회식을 하는데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개들을 소탕하고 여수로 진격이다”라는 외침이 들렸다고 합니다. 장교 일부는 그 자리에서 총격에 숨졌고 일부는 연대 본부나 중대로 피신했지만 결국은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육사2기인 1대대장 김왈영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를 비롯해서 육사2기,3기,4기,5기,6기의 장교 20여명과 하사관,사병 40여 명이 남로당원들에게 사살됐습니다.
총소리와 비명소리 속에 비상나팔이 울리자 영문을 모르는 1대대원들이 연병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지창수 상사가 거짓말로 사병들을 선동했습니다. ‘여수 경찰이 일본 해군과 합세해서 14연대를 공격하려고 하니 악질 반동 경찰을 타도하자’, 경찰에 대한 군의 악감정을 이용한 것이죠. 당시 14연대 사병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부대 내에 남로당원들이 ‘우리가 제주도에 출동하면 비행기가 그 배를 폭파시킬 예정이다’라는 유언비어까지 퍼뜨려 놓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지창수는 또 ‘제주도에서 인민들이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일당에 항거해 싸우는데 왜 우리가 제주도에 가서 동족상잔을 하느냐’ ‘이미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서 남하하고 있으니 우리는 인민해방군으로 북상하면 대전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선동했습니다.
인민해방군으로 북상하자는 얘기까지 나오자 하사관 2명과 사병 1명이 저항했는데 남로당 하사관들이 이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습니다. 나머지 사병들은 무서워서라도 동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제주도 출동을 위해서 무기고에는 평소보다 소총,박격포,탄약이 2배나 쌓여 있었습니다. 남로당원 차경석 하사가 무기고 보초를 사살하고 쌓여 있던 무기와 반납 예정이던 구식 무기 3천정까지 꺼내 나눠주자 2대대, 3대대 병사들까지 3천여 명은 영문도 모르고 순식간에 반란군이 돼 버렸습니다.
- 여수 시내 곳곳에 내걸린 적기와 인공 포스터
이들이 부대 정문 앞으로 나설 때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좌익단체인 여수인민위원회 소속 23명이 밤 8시부터 정문 앞 식품점에 집결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14연대 반란군이 나오자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면서 합류했습니다. 이들이 미리 부대 앞에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장병들의 우발적인 ‘봉기’가 아니라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벌어진 반란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은 국방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반란군과 좌익 세력은 물밀 듯이 여수 읍내로 진격했습니다. 새벽 3시 여수경찰서가 점령됐고 5시에는 관공서, 은행, 신문사를 모두 접수했고 5시 반에는 여수 시내 곳곳에 인공기가 내걸렸습니다. 10시에는 읍사무소에 보안서를 설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가족, 공무원, 우익 인사와 청년들, 그 가족들을 참혹하게 학살했습니다. 시내에 있던 좌익단체, 학생들 600여 명이 합세해서 인민공화국 만세, 인민해방군 만세를 불렀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어찌 된 일인지도 모른 채 불안과 공포에 떨었고 며칠 지나서야 중앙 방송을 통해 이들이 공산당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여수가 완전히 장악되면서 시내 곳곳에 인민공화국 적기가 게양되고 관공서마다 인민공화국 포스터가 나붙었습니다. 오후 3시에는 중앙동 광장에 4만 명이 모인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습니다. 한 집에 한 명씩은 나오라는 강요로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결정된 인민위원회의 6개 항목 결정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 ‘대한민국의 분쇄’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
반란 주역 지창수 상사가 환호 속에 유창한 언변으로 연설을 했는데 순박한 주민들이 그 내용을 그대로 믿는 분위기였다고 당시 주민들은 증언합니다. ‘인민군이 이미 38선을 뚫고 밀고 내려오고 있다, 우리가 남쪽에서 밀고 올라가면 조국이 통일되는 순간이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반란 시작 때부터 일관된 지창수의 이런 거짓말 ‘인민군이 이미 밀고 내려오고 있다’는 개인적 상상력이 아니라 지창수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를 받은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인민군이 이미 밀고 내려와서 곧 공산당 천하가 된다는 거짓말, 그리고 상당수 대중이 이를 믿은 것이 여수순천사건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당시 신문에는 보도돼 있습니다.
- 인면수심의 학살극
반란군은 호남 전역으로 진격했습니다. 10월 20일 순천, 벌교, 고흥, 10월 21일 구례, 남원, 22일 곡성, 광양, 보성까지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잔인한 학살이 도처에서 자행됐습니다. 그 기록을 차마 이 영상에서 그대로 옮길 수는 없는 정도입니다. 매일 인민재판이 열려 죽창,총검,몽둥이로 사람들을 현장에서 때려 죽였고 양계원 순천경찰서장은 눈알이 뽑히고 군용차에 매달려 비포장도로를 돌다가 돌로 머리와 다리를 내리치고,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고 합니다.
순천이 진압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인 10월 25일 순천 현지에서 취재한 유건호 조선일보 특파원의 기사에는 “길거리엔 이곳저곳 시체가 산란한데 어느 것은 썩고 어느 것은 불에 타고 어느 것은 개가 덤벼 뜯어먹고 있다. 순천경찰서 문 안에 들어서니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팔을 묶이어 총살을 당한 외에 다시 가해를 당한 70여 구의 시체가 뒤엉켜 있고 불탄 버스 속에는 백골이 우수수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반란군이 순천에 들어올 때부터 진압될 때까지를 현지에서 모두 취재한 경향신문 이수도 특파원의 기사는 더 생생합니다.
“반란군은 경찰서를 점령하자 먼저 유치장의 죄수를 풀어 무기를 주고 죄수 혹은 좌익 학생들을 선두로 집집을 모조리 수색하여 피난한 경관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혹은 경찰서 마당으로 데려가 총살했다. 순천경찰서 마당은 계속되는 잔혹한 사형으로 생지옥을 이루었다. 반란군에 협력한 사람은 중학,농업중학,여자중학 등의 좌익학생이었으며 이밖에 청년들까지 반란군의 세력은 약 이천명 가량이다. 행렬 선두에는 트럭을 탄 반란군, 다음으로는 하찌마끼(머리띠)를 한 남녀학생과 일반청년, 끝으로는 트럭을 탄 무장반란군으로 모두 인민공화국 기를 들고 적기가를 불렀다. 읍내에는 가가호호에 인민공화국기가 걸리고 반란은 순천 뿐 아니라 서울 부산도 같은 경우에 이르렀고 북조선에서 인민군까지 진주하였다는 허무맹랑한 낭설을 선전했다. 순천경찰서에는 인민재판소를 설치하고 집집이 이잡듯이 수색하여 경관, 우익정당, 청년단체, 예수교 관계인들을 잡아갔다. 위원들이 늘어앉아서 피고가 들어오면 몇마디 심리가 있다가 사형 무죄 혹은 징계로 구타 등 세가지 종류로 즉석에서 판결한다고 한다. 식산은행,우편국,조흥은행,금융조합, 읍사무소,군청 등에서 1천 2백만원과 공문서가 약탈됐다. (경향신문 10월 28일자 이수도 특파원 목격기. ‘목불인견의 참상’)
10월 21일 국군 전투사령부가 설치되고 23일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여수가 탈환되는 27일까지 8일 동안은 호남은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는 전시상태였고 신생 대한민국의 존립이 흔들리는 위기였습니다. 참혹한 현장을 접한 군경의 분노도 극에 달했고 진압 과정에서 많은 양민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반란과 학살 행위가 있었어도 기소하고 재판해서 처벌하는 것이 법치국가이죠. 그런데 일부 군 지휘관,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민간인들이 현장에서 좌익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고,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게 협조할 수 밖에 없었던 양민들도 있었을 텐데, 가족관계, 식사 제공 등의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평소에 원한이 있었던 사람들이 서로 좌익이라고 고발해서 수사기관이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도 남아 있습니다. 피의 학살이 피의 보복을 불러왔고,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양민들까지 희생되는 끔찍한 비극이 된 것입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순천이 탈환됐지만 사건을 일으킨 좌익 수괴 상당수는 진압되기 전에 바다를 통해 탈출했고, 김지회,홍순석 등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돼서 49년 4월까지 대한민국 국군과 끈질기게 싸우다 사살됐습니다. 엉겁결에 반란군이 된 사병들도 어쩔 수 없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여수순천사건이 진압된 뒤에도 남로당 세력이 강했던 대구6연대를 비롯해 광주4연대, 마산15연대, 군산12연대 등에서 12월까지 남로당원들의 소규모 반란이 잇따랐고 마침내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숙군 작업이 단행돼 국군 총 병력의 10%에 달하는 1만명이 처벌, 불명예제대, 탈영한 것은 앞선 영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4.3사건도, 여수순천사건도 무고한 양민의 희생에 대해서는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고 정당한 보상을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본질이 ‘대한민국은 친일파와 미 제국주의에 의한 정권’이라는 공산당 세계관을 가진 세력이 체제를 전복하고 김일성 세력과의 남북통일을 통해 공산 정권을 수립하려는 목표 아래 일으킨 사건이며,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학살극으로 시작됐다는 것은 역사의 기록으로 볼 때 명백한 것이고, 백범 김구 선생도 사건 진압 4일 뒤인 48년 10월 31일 이 사건을 반란, 야만적 행동으로 규정하고 동포들은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성명을 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14연대반란이 일어난지 77년 되던 지난 10월 19일 “제14연대 장병 2000여 명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당한 명령에 맞선 결과는 참혹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군사반란을 정당한 항명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부정이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입니다. 우리의 토대를 부정하면 그 토대 위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이 부정됩니다.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역사를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현재가 부정되는 것이고,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미래의 방향도 부정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있었던 사실 그대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가는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