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한 장 20. 강운구의 ‘우연 또는 필연’ 사진전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내설악) 1977 ©강운구

한 남자가 낫을 들고 앉아서 쉬고 있다. 눈길이 가는 것은 낫이 섬뜩하거나 다리가 근육질이어서가 아니다. 걷어 올린 종아리와 발은 낫처럼 구부러져 형태가 반복을 이루고, 기둥처럼 양쪽에 배치된 다리의 핏줄은 오랜 노동의 흔적이다. 얼굴도 장소도 생략된 거친 피부는 감상자에게 프레임 밖 인물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아버지’나 ‘노동’, ‘휴식’, ‘가장’, ‘천직’ 같은 단어가 떠오르게 하는 사진이다. 사진이 시간과 장소의 구체성을 버리고 여러 의미로 읽힌다는 건 그만큼 사진가의 깊은 관찰과 오랜 기다림에서 나온다. 얼굴이나 옷, 움직임, 주변 풍경에 포커스를 맞추는 평범한 앵글을 낫으로 쳐내듯 과감히 버리고 보여줄 것만 집중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내설악) 1977 ©강운구

이 사진은 사진가 강운구가 1977년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서 찍고 1994년 책과 전시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었다. 요즘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는 31년 만에 사진가의 ‘우연 또는 필연’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31년 전 그의 사진전은 유료 입장객만 1만5천명이 넘게 올 만큼 관람객들이 몰렸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내설악) 1977 ©강운구

이번 전시도 ’70년대 근대화 이전 농촌이나 서울 풍경 등 총 130여 점의 흑백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우연 또는 필연’ 외에도 작가의 초기 사진집인 ‘모든 앙금’, ‘마을 삼부작’ 등도 포함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가장 한국적인 질감으로 우리나라 작가주의 사진을 개척한 사진가”라는 찬사를 보냈다.

전시 제목은 왜 ‘우연 또는 필연’일까? ‘우연 또는 필연’은 강운구의 사진론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사진의 ‘결정적 순간’처럼 강운구는 운 좋게 찍는 사진이란 사진가의 간절한 바람과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다음은 지난 11일 전시 개막 때 강운구가 설명한 자신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다.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도 1974 ©강운구

-간절히 바라면 우연은 찾아온다.

삼십 몇 년 만에 필름을 봐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상당히 기뻤고, 사진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과 내용을 다시 꼼꼼히 챙겨보면서 ‘나쁘지 않네’ 이런 생각을 했다. 꾀를 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했기 때문에, 50년이 지나도 찍은 스타일로 봐서는 낡은 것이 없었다. 스스로 잘 찍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잘 찍은 것 보다 똑바로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똑바로 찍고, 꾀를 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스트레이트로 했기 때문에, 5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내고 ‘별로 나쁘지 않네’라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어떤 사람한테는 우연이 가고, 어떤 사람한테는 우연이 안 가는 수가 있다. 우연이 간다는 것, 우연이 작용한다는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소를 좋아해서 소만 보면 찍었는데, 찍다 보니 소가 쓰러지는 모습도 우연하게 찍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늘 어떤 것을 기대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다니면 우연은 들어온다. 누군가 볼 때 이것은 우연이지만 내가 볼 때는 필연이다. 전시 제목에 ‘우연과 필연’이 아니라 ‘우연 또는 필연’이라고 붙인 이유도 우연이나 필연은 결국 한 통속이라는 의미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장수읍) 수분리 1973 ©강운구

위의 사진은 많이 알려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늦어도 개는 없고, 사실 여기 개가 없었어도 충분히 사진은 될 것이다. 그러나 재수가 좋았기 때문에 개가 빠져나가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이것도 ‘우연 또는 필연’이라고 생각된다. 여기 어린이에게 손수건이 달렸는데 당시 국민학교를 가려면 손수건을 달아야 했다.

경상북도 월성(경주시 월성동) 1973 ©강운구

이 사진은 상당한 깊이감이 있는 사진인데 21mm 렌즈로 찍었다. 라이카 M의 수퍼 앵글론(구형 초광각 렌즈)은 찍기가 굉장히 어려워 왜곡도 많지만 잘 이용하면 원근감이 좋게 나온다. 그 어려운 70년대에 수퍼 앵글론을 어디서 샀느냐, 질문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우연 또는 필연이다. 당시『영상』이라는 사진 잡지가 새로 창간이 되었는데 창간호에 내가 촬영한 수분리에서 찍은 눈 오는 사진들을 보고 어떤 재미교포 출신 주한미군이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자기도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며 라이카에 21mm 렌즈를 들고 왔기에 한번 써보자고 했더니 “이거 팔 수 있다” 해서 그 친구한테 이 렌즈를 사게 되었다.

서울시 1973 ©강운구
서울시 1973 ©강운구

눈 오는 날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길이다. 연탄 수레를 끄는 사람이 한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힘든가 보다 짐작을 했다. 예상대로 쉬면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35mm 렌즈로 찍고 같은 자리에서 200mm 렌즈로 클로즈업을 몇 장 더 찍었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손가락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진을 인화하면서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미안했다. 촬영 중에 눈이 마주쳤는데 옆을 지나갈 때 인사했더니 놀라서 그도 나를 보고 얼른 인사를 했었다. 이 사진에도 ‘우연 또는 필연’이 담겨있다.

한해의 마지막 날, 다음날인 새해와 비교 하기 위해 촬영했다. 서울시 중구 을지로 입구 1973년 12월 31일 ©강운구
새해 아침,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다. 서울시 중구 을지로 입구 1974년 1월 1일 ©강운구

우연은 많지만, 버려져 있는 사람한테는 우연은 절대 가지 않는다.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면 우연은 항상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건 누군가에겐 필연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흘러갈 수도 있다. 우연 또는 필연은 결국 나의 사진 방법론이다.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촬영했다. 강운구는 '잘살려고 하는 일에 너도나도 앞장 서자'라는 글이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했다. 1973 ©강운구

강운구 사진가의 ‘우연 또는 필연’ 전시는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내년 1월 9일까지 한다. 관람료 무료.

사진 제공: 고은사진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