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순간 33. 동물 사진가 박찬원의 인간 탐구
지난 2022년 9월 박찬원(81)의 젖소 사진 전시를 찾았을 때 사진가는 기자에게 “다음 촬영 대상은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 3년 동안 박씨는 사람을 대상으로 촬영했고 현재 서울 강남역 앞 사진 갤러리 스페이스22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사진전의 제목은 ‘이렇게, 아직도, 그러나’.
2년 전 전시 사진들을 보면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은 우리가 알고 있던 대낮의 소가 아니었다. 어두운 밤 어렴풋한 잔광으로 사진가는 소의 실루엣들을 촬영했다. 촬영을 위해 축사에서 먹고 자다가 우연히 소의 일부만 보여주는 사진들만 골랐다. 사진가는 역동적인 소는 남들이 이미 보여줬기에 자신의 방식을 찾은 거라고 했다.
박씨는 삼성전자 등 대기업에서 40년 넘게 일하고 퇴직 후 68세에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웠다. 늦게 시작했지만 제대로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스스로 주제를 찾고 한 가지 주제에 ‘100일간 촬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00일은 단순히 달력에서 연속된 날이 아니다. 촬영 중에 사진을 보면서 글로 쓰고 점검하며 변화의 시간을 두고 다시 촬영하는 것을 반복한다. 이렇게 쉬다가 다시 하는 기간까지 더하면 한 주제에 평균 2년에서 3년이 걸린다고 했다.
촬영에 이런 시간을 갖는 이유를 묻자 “대가들은 점 하나만 찍어도 작품이지만 신인들은 남에게 보여주려면 오직 노력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향 대부도에서 염전에 빠져 죽어 있는 하루살이를 시작으로 10년 넘게 거미, 돼지, 말, 젖소 등을 촬영 후 책을 내고 전시를 하자 사람들은 그를 동물 사진가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는 어떤 사람들을 촬영했을까?
사진가는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사람의 특징을 손과 발, 머리라고 생각했다. 사람에겐 도구를 쓰는 손과 직립 보행으로 움직이는 발, 그리고 언어와 사회, 과학과 문명으로 이끈 머리가 있다. 촬영은 가까운 주변 친구들부터 시작했다. 손과 발, 머리에 사연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박찬원은 결국 찍다 보니 80대의 삶이 되고 자화상 같은 전시가 되었다고 했다. 발과 머리의 모델은 사진가의 중고등학교 동창들이고 손 모델은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다.
60년 넘게 알고 지낸 동창들이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식사하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시된 사진 속의 세 사람은 평생을 교사와 은행원, 사업가였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기보다 노년의 고통을 맞서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었다. 박찬원은 세 사람과 동행하며 느낀 인생의 소회를 작업 노트로 정리했다.
K의 손- “마지막이다. 모든 게 소중하다”
45년생인 K는 손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잘했다. 6·25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40세에 남편도 사별했지만 초등학교 교사로 세 자녀를 훌륭히 키웠다. 사진가와 만나 촬영 중이던 2023년 연말에 췌장암 시한부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다가 그만두고 끝나는 날까지 자유롭게 살기로 했다. 우쿨렐레도 배우고, 매듭 공예, 종이접기도 하면서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있다. 다음은 K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사진가의 작업 노트.
햇빛, 바람, 맑은 하늘이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다. 2박 3일 기차로 고등학교 동창들과 남도 여행을 떠난다. 60년 만난 친구들. 뭉클하다. 떠나는 길이다. 잠깐씩 스치는 것마다 소중하다. 몇 번 다녀간 곳인데 새롭게 보인다. 깊게 길게 마음속에 넣는다. 걸으면 찌릿찌릿 얼음 위를 걷는 듯 아프다. 내색하지 않고 활짝 웃는다. 큰소리 친다. 친구들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이 순간이 좋다. 마지막이다.
S의 발 - “아프면 걷는다”
44년생인 S는 은행원으로 30년 일했고 명퇴 후 들어간 등산학교는 S에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젊은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바위를 탔다. 북한산 백운대만 100회 넘게 다녀왔다. 최근에 지독한 족저근막염에 걸려서 걸으면 안 되지만 오랫동안 가진 꿈인 팔십에 인수봉 암벽 등반을 결국 성공했다. 손에 마비가 왔지만 제일 쉬운 비둘기 길로 올랐다고 했다. 바위를 타면 모든 것을 잊는다고 했다. 히말라야 트래킹도 다녀왔는데 갖고 간 옷과 장비를 현지 안내인에게 모두 선물로 주고 왔다. 한 직장에서 30년, 은퇴 후에도 30년을 혼자 걸었다고 했다. 등산 동료들이 정상에서 ‘인수봉 졸업식’도 해주었다.
L의 머리- “삶은 기적의 연속”
43년생인 L은 젊었을 때 23개의 직업을 가졌다.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거쳐 결국 교회 장로가 되었다. 어느 날 L은 뇌졸중에 걸렸다. 뇌졸중 후유증인지 보청기를 해도 소리가 또렷이 안 들린다. 안경을 벗으면 안 보이고, 틀니를 빼면 먹을 수 없었다. 잘 안 들리니 목소리가 커서 거칠고 오해도 받는다. 유일하게 기도할 때만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계단을 못 올라가서 통곡할 때 유일하게 손을 붙잡아 준 분이다. 비틀거리며 교회에 오는 것이 운동이 되어 살아났다고 했다.
박찬원은 이번 전시에 대한 작업 노트에 “이 땅의 80대는 8·15 해방 이전에 태어난 마지막 세대지만 6·25와 4·19, 5·16을 거치고 12·12도 겪었다.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를 앞장섰고 사우디 건설 공사, 월남 파병 등을 거치며 항상 새 길을 뚫어왔다”고 했다. 전시는 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