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한 장 17. 노무라 목사의 청계천 빈민가 사진들
바닥과 기둥을 나무로 제작한 실내에서 사람들이 재봉틀을 돌리는 이곳은 1970년대 서울 청계천 봉제공장이다. 창문이나 환풍기도 없이 비좁은 실내에서 일부는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아 쓰고 남은 천 조각들을 모으고 있다. 청계피복 노조원이던 전태일도 이런 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다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1970년 11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분신 사건으로 이곳의 열악한 환경은 세상에 알려졌지만 사진에서 보듯 크게 변하진 않았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사진갤러리 인덱스에서 현재 전시 중인 ‘노무라 컬렉션’은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목사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사진으로 기록한 서울 청계천 빈민촌과 농촌 풍경이다.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과 수의학을 공부했던 노무라 목사(94)는 1968년 처음 서울 청계천 빈민가를 방문하고 그곳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아 빈민 선교와 봉사에 헌신했다. 목사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해 깊은 참회의 마음을 갖고서 한국을 50번 넘게 방문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도심 생태 복원의 상징이 된 지금의 서울 청계천은 과거에 6·25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 특히 북한 실향민들이 서울로 와서 정착했던 빈민가였다. 청계천을 따라 거대한 패션 상권을 이루는 평화시장도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이 평화를 염원하며 붙인 이름이었다.
천변에는 나무판자로 지은 가건물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이름과는 다르게 개천은 쓰레기와 오수가 흘렀다. 이런 과거 청계천의 모습들을 당시 몇몇 사진가들도 촬영했지만 대부분 주민들이 천변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처럼 멀리 서 풍경 위주로 카메라에 담은 사진들만 있었다. 그런데 노무라 목사가 찍은 청계천의 사진은 달랐다.
남루한 차림새에도 청계천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다. 누군들 이런 오수가 흐르는 청계천 판잣집에 살고 싶으랴.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도 빈부 격차는 극심했고, 전쟁 후유증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비록 아마추어 사진가였지만 노무라 목사는 카메라를 들고서 청계천 판잣집을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오랫동안 소통했기에 주민들이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목사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도 존엄을 잃지 않았던 한국인들을 늘 존경했고 사랑했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사진 속엔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찍은 단발머리 미싱시다(보조)와 판잣집 아이들의 수줍은 미소가 사진에 담겨 있었다.
“1970년대 어려운 시절에 몰래 찍어둔 사진들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돌려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던 노무라 목사 부부는 현재 병상에 있다. 사진들은 지난 2013년에 ‘노무라 리포트(눈빛출판사)’라는 사진책으로 처음 소개되었고, 목사 부부의 쾌유를 기원하며 처음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는 23일까지.
<사진 제공=갤러리 인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