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순간 31. 사진가 백상현의 품격 있는 흑백 사진
카메라는 빛을 따라다닌다. 영어의 Photography(사진)도 그리스어 ‘phos(빛)’과 ‘graphos(그리다)’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림자를 어두운 부분으로 무시해버리면 사진에서 농도나 계조(gradation)는 포기하는 것이다. 빛이 부드럽게 나온 사진들은 풍부한 계조를 갖고 있다. 흑백 사진들은 컬러의 다채로움을 버리는 대신 계조를 민감하게 따진다. 계조가 풍부하면 사진이 사실적이고 아름답다. 그래서 필터를 낀 밝은 단렌즈에 카메라를 삼각대에 놓고, 가능하면 낮은 감도(iso)로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찍는다.
풍부한 계조의 흑백 사진으로 건축물을 기록하는 백상현 사진가의 전시가 오는 25일 부터 경기도 안산시 문화예술의 전당 화랑전시관에서 ‘빛으로 그린 공간의 미학, 현대건축’의 제목으로 열린다. 2008년부터 오래된 한옥들을 흑백으로 기록해온 사진가는 어느 날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을 갔다가 현대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뮤지엄 산’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으로 원주 오크밸리 안에 있다.
이번 전시의 사진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건물들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자주 가는 사람들이 한 번은 가봤을 것이지만 정말 이런 모습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사진은 독특하고 간결하며 아름답다. 사진가는 흑백사진 계조를 최대한 살려서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광선으로 건물의 특성들을 곡선이나 사선, 삼각형, 방사형 등으로 단순화시켰다.
뮤지엄 산의 천정에서 내려오는 X자형 빛은 건물 외부 햇빛이 실내로 십자가 형상으로 들어오는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를 연상시킨다. 부드러운 곡선의 빛이 겹쳐진 모습은 경기도 파주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천장 일부를 촬영한 사진이다. 부드러운 종이를 둥글게 말아서 이어놓은 모습의 건물도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다. 사진가는 드론이 아니라 옆 건물에서 100-400mm 렌즈로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촬영했다. 백 씨는 모든 사진을 한 번에 가서 촬영하지 않고 적어도 4, 5회 이상을 간다며 대부분 “삼각대에 카메라를 놓고 찍는다”고 했다. 사실 요즘 카메라들은 일반 사용자들도 삼각대 없이 찍어도 초점이 안 흔들릴 정도로 나온다. 감도가 높고 셔터스피드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각대에 놓고 사진을 찍어야하는지 물어 보았다.
사진가들이 삼각대를 쓰는 이유는
“사진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첫째”라고 사진가는 단언했다. 너무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피사체의 초점이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진의 계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계조가 충분하려면 빛의 대비(contrast)가 심하지 않아야 한다. 또 어두운 부분도 살려야 하는데 ISO 250이하의 저감도에 삼각대 위에 놓고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작가는 “30분의 1초 이하 사진은 다 버릴 생각으로 찍어라”고 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처럼 고속 연사촬영은 결코 하지 않는다며, 사진 한 장을 찍고 적어도 10초 후에 기다렸다가 촬영한다고 했다. ‘찰칵’ 하며 넘어가는 카메라 미러(MIRROR)의 미세한 진동이 5초 이상 계속되어서다. 사진가는 “6000분의 1초로 찍어도 확대하면 미세한 흔들림이 있다”면서 가능하면 광선의 대비가 크지 않은 약간 흐린 날을 택해서 삼각대 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때도 손떨림 방지를 위해 릴리즈로 촬영한다고 했다.
백 씨는 촬영 뿐 아니라 프린트도 오랫동안 자신이 익혀온 존 시스템(Zone System)의 경험을 살려 계조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흑백 사진의 정밀한 톤을 완성하기 위해 미국 풍경 사진가 앤셀 아담스(Ansel E. Adams) 등이 창안한 존 시스템은 사진의 밝고 어두운 부분을 11단계로 분리해서 촬영하고 인화한다. 사진가는 아날로그 필름이 아닌 포토샵 보정 시대에도 존 시스템을 이해하고 촬영한다면 풍부한 계조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다.
전시를 위해 사진 프린트를 할 때도 인화지 브랜드에 따라 전혀 다른 질감의 사진이 나오기 때문에 사진가는 일포드, 하네뮬레 등 열 장의 다른 인화지로 테스트를 한 후 사진에 따라서 결정한다. 사진 보정이 쉬운 오늘날 이렇게 어려운 과정으로 사진을 완성하는 이유를 물었다. 백상현은 자신이 추구하는 사진은 계조가 살아있고 톤이 부드러운 예술 사진이라며 “톤이 부드러워야 사진이 고급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시는 5월 1일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