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복서'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권투 선수로 가난을 벗어나려 했던 어린 시절 한 친구를 기억하면서 촬영했다./ 사진가 김문호

창작의 순간 29. 김문호 사진가의 사회적 풍경

한쪽 벽이 무너져 태극기가 반쯤 사라진 건문이 있는 이곳은 전북 군산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쌀 수탈을 위한 창고였지만 광복 후 다른 용도로 쓰다가 지금은 비어 방치된 폐허의 태극기도 절반만 남아있다. 사진을 촬영한 김문호(72) 사진가는 군산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살다가 고교 때 서울로 올라왔다. 어릴 적 추억이 많던 이 도시를 사진가는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찾아다니며 기록했다. 최근에 책을 내고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스페이스22에서 ‘군산구경(群山久景)’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군산에서 한 일본 상사의 미곡 창고로 사용되던 건물.반쯤 부서진 벽 위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사진가 김문호

카메라나 사진에 관한 책들을 본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한 2000년 초부터 나온 ‘내셔널 지오그래픽 필드가이드’ 시리즈나 사진의 기초와 조명, 구도 등의 원리를 설명한 많은 외국 서적을 그가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의 역서는 사진뿐 아니라 문화나 종교에 관한 인문학책도 많다. 그러나 번역가 이전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 안 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었다.

쌀 창고로 쓰던 건물.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사진가 김문호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1986년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린 최민식 사진가의 전시를 보고 다큐멘터리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다른 사진가들과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책도 내고 전시도 했다. 2003년엔 외국인 이주 노동자나 장애 가족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군산 아메리카 타운의 한 주점. 과거에 미군들이 주 고객이던 주점들은 이제 내국인들을 손님으로 맞고 있다./사진가 김문호

2014년에 발표한 ‘온 더 로드 On the Road’를 통해 사진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가 스스로 “20년간(1989년부터 2009년까지) 찍은 사진에서 고른 것”이라 했다. 지하철 승강장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다리,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 해변에 쓰러진 듯 자고 있는 남자, 한 여성의 그림자 등 아무런 설명 없이 이어지는 이미지는 사진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후에 발표한 ‘섀도Shadow(2013)’나 ‘성시점경In the city(2018)’, ‘풍리진경(2022)’ 등도 흔들리고 어두운 흑백 사진들 속에 막연하게 도시나 문명에 대한 어두운 현재를 담은 모습으로 비쳐졌다. 전시가 열린 4일 오후 갤러리를 찾았다.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직접 답을 들었다. 다음은 김문호가 말하는 다큐 사진과 전시 사진에 관한 답변들.

이층 적산가옥을 개조한 건물들이 군산 시내에는 아직 남아 있다./ 사진가 김문호

-사적인 관점의 다큐 사진.

다큐사진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미나마타병의 참혹함을 환자들의 모습으로 고발한 유진 스미스(Minamata, 1972) 같은 방식이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이라는 공적 이슈를 시각적으로 드러나게 보여주는 방법이다. 문제의 핵심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사회에 직설법으로 발언하는 방법(Public Statement)이다. 반면에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The Americans, 1958)’처럼 사적인 관점(Private View)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동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새만금 방조제로 갯벌과 갯벌의 생명들은 사라졌지만 수라마을의 한 바위에는 또 다른 생명이 살고 있었다. 작가는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남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가 김문호

나의 작업은 사진에 어떤 부가적인 설명이 없어도 1950년대 미국 사회를 기록한 로버트 프랭크처럼 사적인 시각으로 기록하는 사진을 추구한다. 그래서 사진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대신 나만의 시각으로 기록한 모습들을 통해 일관된 주제와 그 배경에서 대상을 보여준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남자들이 줄을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온더 로드1989-2009, 2014)은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로 보였다. 사진책 속에 한 장이나 전시장에 걸린 사진 하나도 모두 전체의 맥락(context)에서 보면 이해된다.

군산 미군부대 앞 주점 여종업원이 사용하던 방에 걸려 있던 작은 소품들. 벽에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이 발코니에 앉아 '문 리버'를 부르며 기타를 치던 모습이 영화 속 신분 상승을 꿈꾸던 주인공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투영된 것처럼 보였다./사진가 김문호
군산역 앞 신축 아파트 단지./사진가 김문호

-생각이 안 나면 그냥 돌아다녀라.

20년 사진들을 모아 발표한 ‘온더 로드’가 끝나고 한동안 다음에 무엇을 찍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양복 입은 남자를 따라가다 셔터를 누른 한 장이 약간 흔들리게 찍혔는데, 흔들리는 사진도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일부러 카메라를 기울이거나 흔들리게 찍으면서 사진들을 모아 ‘섀도Shadow(2013)’를 발표했다.

어떤 사건이나 역사적 행사를 보여주는 대신 사적인 시각으로 주제를 담는 다큐 사진에서 대상을 찾기는 어렵지만 나의 경험을 말해보면, 무엇을 찍어야 할지 생각이 안 나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서 그냥 돌아다녀보라. 이성이 막혀 있을 때 감성에 의지하면 길이 보일 때가 있다.

군산의 4월은 지천으로 벚꽃이 만발한다. 전시장 맨 처음에 걸려 있는 이 사진은 꽃들이 만발한 어느 봄 날 잠깐 꾼 꿈처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진가가 고향을 그리던 마음 같았다. 군산 은파호수공원에서 촬영./ 사진가 김문호

-군산의 추억들.

태어나고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군산에는 추억이 많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군산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 가옥이나 철길들, 옛 군산역 앞 도깨비시장과 미군 부대 앞 아메리카타운, 부두의 거대한 창고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추억의 공간들이 아직 남아있지만, 그동안 큰 변화도 없는 도시다. 그래서 전시 제목인 ‘군산구경群山久景)’에도 옛 ‘구(久) 자’를 넣었다. 사진마다 이전 방식으로 기록했지만 보다 사적인 시각으로 옛 친구들에 대한 추억을 담았다.

전시는 2월 20일까지.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수많은 사진 서적들을 번역한 김문호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