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연의 ‘북한산(2019)’ 연작 중 '흰입'. 주인이 유기한 반려견들은 산으로 올라가 들개가 되었다. 서울의 화려한 도심 야경을 뒤로 하고 산을 오르는 저 개는 사람들을 그리워할까? / 뮤지엄한미 (원본 크롭)

장맛비와 열대야가 반복되는 여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뮤지엄한미 삼청에서는 밤을 소재로 하는 사진 전시 ‘밤 끝으로의 여행’이 열리고 있다. 밤 사진이라고 특별할 게 있나 싶지만, 전시는 태양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이 시간을 ‘무의식’이나 ‘꿈’, ‘욕망’, ‘죽음’ 같은 주제별로 묶어 국내외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 100여점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스타이컨의 ‘플랫아이언빌딩(1904)’. 뉴욕 맨해튼의 22층 빌딩을 촬영한 후 독특한 감광 유제를 만들어 프린트 했다. 빌딩 자체 보다 사람과 사물이 모두 희미한 어둠이 주는 아름다움을 촬영했다. / 뮤지엄한미

20세기 초 사진이 예술로 분류되기 위해 노력했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컨의 ‘플랫아이언빌딩(1904)’은 뉴욕 맨해튼의 22층 빌딩을 촬영한 뒤 독특한 방식으로 프린트한 사진이다. 삼각형 모양으로 다리미 같다고 붙여진 이름의 빌딩 자체보다 어스름하게 보이는 불빛과 마차들이 어디선가 마주친 모습처럼 보인다. 김광균의 시 ‘와사등’에서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 같이 황혼에 젖어”처럼 빌딩은 거대한 비석 같다.

자나 브라스키의 '애니멀로그램(2019)' 연작. 사진가는 감광유제를 바른 종이를 숲에 설치한 후 곤충들이 앉은 종이에 약한 인공 조명을 쳐서 카메라 없이 포토그램으로 사진을 제작했다. 이 전시엔 여러 장의 사진을 창호지에 프린트해서 보여준다/ 뮤지엄한미

전시에선 자나 브리스키가 촬영한 나방과 곤충들의 포토그램 사진이 가장 먼저 관람객들을 만난다. 어두운 산 속에서 불빛을 보고 방안에 들어온 거대한 나방을 마주한 기억이 났다. 여름밤 야영이나 캠핑을 가면 벌레가 제일 무섭다. 특히 나방은 나비와 다르게 털이 많아 거친 외모가 더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사진가는 빛이 거의 없는 산속에서 커다란 종이에 감광 유제를 발라 설치 후 나방이나 곤충, 동물들이 다가오거나 종이 위에 붙으면 미세한 빛을 노출시켜 사진으로 제작했다.

모리야마 다이도의 ‘아오모리 미사와의 들개(1971)’. / 뮤지엄한미

모리야마 다이도의 ‘아오모리 미사와의 들개(1971)’는 무섭게 렌즈를 노려보는 개 한마리가 배경이 생략된 프레임 안에 꽉 차있다. 고개를 돌리고 입을 반쯤 벌린 상체는 역광으로 찍혀 감상자의 시선은 맹렬한 야수의 눈빛에 집중된다. 반면 권도연의 ‘북한산(2019)’ 연작은 카메라를 쳐다보는 어둠 속의 개가 보인다. 주인을 잃고 야생으로 돌아간 개를 밤에 만나면 무섭다. 권도연의 사진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개들은 어둠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보다 더 외로워보인다. 누군가의 반려견이었을 개들은 산으로 올라가 외로운 들개가 되었다. 생명은 모두 외롭게 태어나지만 밤은 그 진실을 깨닫게 한다.

김남진의 '이태원의 밤(1986)' 연작. 사진가는 2년 동안 주말마다 이태원을 찾아가서 사람들과 안면을 익혀가며 사진을 찍었다. / 뮤지엄한미

빛과 소음에 둘러싸인 낮을 지나 어둠에서 본색이 드러나기도 한다. 김남진의 ‘이태원의 밤(1986)’은 1980년대 서울의 최고 핫플레이스였던 이태원 밤거리를 기록했다. 2년간 주말마다 밤거리를 다니면서 사진가는 야간업소 종업원들, 삐끼(호객꾼)들과 친해졌고 나중엔 웨이터나 삐끼들의 안내까지 받으며 촬영했다. 광량이 센 플래시(메츠)를 팡팡 터뜨리며 찍어도 시비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김태동의 ‘Day Break(2013)’시리즈/ 뮤지엄한미

도시의 밤거리에서 만난 청년들을 찍은 김태동의 ‘Day Break(2013)’시리즈는 어둠이 가진 낯설고 깊게 침잠하는 분위기를 안정된 구도, 간결한 색감들을 통해 보여준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는 사람들(Nighthawks, 1941)’처럼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기댈 수도 없는 밤거리의 고요과 고독을 느낀다.

김인숙의 '토요일밤(2004)'.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 호텔 안 주말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사진은 사진가가 방마다 한 장씩 상황을 설정해서 촬영 후 사진 한 장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눈 내린 어두운 밤 호텔 안 모습은 얼핏 장난감 세트 같은 느낌을 준다 / 뮤지엄한미

전시의 마지막은 김인숙의 ‘토요일밤(2004)’이 걸려있다. 과거 다른 전시에서 이 사진을 처음 본 충격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 호텔의 66개 객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커튼이 걷힌 창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객실 안에서 벌어지는 섹스와 살인, 도청, 외출 준비 등의 모습들을 통해 밀폐된 공간 속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현대인들의 삶을 메이킹 포토 형식으로 촬영했다.

이 외에도 브라사이, 앤셀 아담스, 에드워드 웨스턴과 다이안 아버스, 윌리엄 클라인, 유진 스미스, 황규태, 구본창, 메플 소프 등 이젠 고전으로 분류되는 프린트 사진들이 있다. 전시는 8월 25일까지.

권도연의 ‘북한산(2019)’ 연작. '흰입' / 뮤지엄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