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민의 '여자의 집1(1999)'. 남편 옷을 다리다 지친 젊은 엄마를 아기가 쳐다보는 시리즈의 첫 사진은 25년 전 바로 사진가가 자신을 찍은 모습이었다. / 사진가 이선민

엄마가 되니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모든 게 육아였다. 엄마의 무게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까, 엄마가 된 친구들도 나처럼 살고 있을까? 아기에 대한 책임은 컸고 개인 시간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선민 사진가(56)는 다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잘 알고 가까운 곳에서 촬영할 수 있고,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진정성도 담아야 했다. 결혼 전처럼 메이킹 포토나 흑백으로 작업할 시간은 없었다. 결국 아기를 돌보며 고립된 시간을 보내던 엄마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과 비슷한 30대 엄마들을 찍었고 ‘여자의 집1(1999)’ 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가는 방 두 개짜리 신혼집에서 아이를 재우고 기획서를 쓰던 것을 회상했다. 남편 옷을 다리다 지친 젊은 엄마를 아기가 쳐다보는 시리즈의 첫 사진은 25년 전 바로 자신을 찍은 모습이었다.

이선민의 '여자의집1(1999)' 연작. 당시 자신처럼 어린 아이를 키우는 30대 엄마의 모습을 찾아 촬영한 사진가는 "하루 종일 육아에 지친 엄마는 아이들이 잠들어야 눈을 붙였다"고 했다. / 사진가 이선민

국내 최고의 사진축제인 동강국제사진제가 지난 12일부터 강원도 영월군에서 열리고 있는 가운데 올해 수상자로 이선민 작가가 선정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사진가에 대해 “가족과 개인, 세대와 성별의 갈등을 과장 없이 카메라에 담아 대한민국의 현실을 꼬집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선민의 '여자의 집2(2004)' 연작. 온 가족이 모인 제삿날, 가부장제의 질서 속에 남녀의 경계는 뚜렷했다. 시어머니도 문턱을 넘지 못하고 가장 바쁘게 준비한 큰 며느리는 고개를 아예 돌리고 앉아있다. / 사진가 이선민

엄마의 역할에 대한 사진가의 탐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시리즈인 ‘여자의 집2(2004)’에서는 가족 삼대가 모이는 행사를 찾아 다녔다. 제사나 명절, 생일 같은 대가족 행사에서 여자들의 역할과 가족 풍경을 통해 가부장제의 질서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다 모인 가족의 모습은 어색했다. 명절에 모여도 서로 대화 없이 TV만 쳐다봤다. 시어머니만 아들과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도 바쁘게 일했던 어머니나 며느리들은 막상 제사가 시작되면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방 안에서 절하는 남자들과 밖에서 지켜보는 여자들의 경계는 뚜렷했다. 시어머니도 문턱에 한 발만 걸쳤고 제사 음식을 모두 준비한 큰 며느리는 아예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선민의 '여자의집2(2004)' 연작. 명절에 가족들은 모여도 서로 대화 없이 TV만 쳐다봤다. 시어머니만 아들과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흔한 우리나라 명절 풍경으로 사진가의 실제 가족이라고 했다. / 사진가 이선민

사진가는 “엄마로 산다는 건 뭔지, 세상에 묻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처럼 엄마가 된 친구들을 촬영하러 남편한테 주말에만 아이를 맡기고 나갈 수 있었다. 제사 촬영을 위해서는 2박 3일간 섭외된 집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잤다. 가족들과 친해지고 자연스럽지 않으면 찍을 수 없는 사진들이었다. 두세 시간 동안 사진을 찍다보면 사람들은 카메라 플래시도 신경 안 썼다. 그렇게 오래 찍다 보면 진실한 모습들이 저절로 앵글에 잡혔다. 얼핏 보면 사진이 연출된 모습으로 보였지만 이선민은 “연출은 없다”고 했다.

이선민의 '아버지의 세대로 부터(2020)' 시리즈, 3대에 걸쳐 수제 양복을 만드는 일을 하던 모델. 뒤에 있는 옷장 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초상 사진이 놓여 있다. 하지만 양복 만드는 일은 다음 세대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 사진가 이선민

시저 같던 절대 권력의 아버지

대학에서 한문교육학을 전공한 이선민은 졸업을 앞두고 나간 중학교 교생실습에서 교사는 ‘내가 못할 직업’이라고 깨달았다. 다른 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중 취미로 하던 사진이 생각났다. 홍익대 대학원을 들어가 사진공부를 시작했고 졸업전시회를 앞두고 절대 권력의 아버지를 빗대어 배우를 로마황제처럼 분장시켜 ‘황금투구’라는 사진 작업을 완성했다. 대학원 졸업 후 결혼 전엔 잡지사 사진기자로 3년간 일하기도 했다.

사진가는 아버지가 수저를 들어야 가족 모두 식사를 했던 전형적인 가부장적 집에서 자랐다. 사진관을 운영하며 학교 앨범을 만드시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최고의 직업은 교사”라고 가르쳤다. 사진가는 왜 이런 생각을 가르치신 걸까 아버지께 묻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보고 싶고 그리웠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대가 궁금했다. 아버지처럼 가난과 이주, 전쟁을 경험하고 손으로 평생 일하신 분들을 만나 촬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한 사진들이 ‘아버지의 시대로부터’(2020)였다. 아버지께 못 들은 이야기를 그분들께 들을 수 있었다.

이선민의 '트윈스(2005-2011)', 사진가는 아이와 같은 복장의 엄마를 통해 "부모의 심리적 쌍둥이인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했다 / 사진가 이선민

계속된 세대와 가족 문화에 대한 호기심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니 새로운 주제가 떠올랐다. 아이 학교의 학부모모임을 가보니 다들 부모 욕심들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처음 소개받은 집에서 아이의 방을 찍기 위해 갔는데 너무 많은 아이 물건과 옷들을 보며 혹시 엄마랑 같은 옷이 있는지 물었더니 서너 벌을 갖고 나오며 “어떤 것을 입을까요?”라고 물어왔다. ‘트윈스(2005-2011)’는 부모의 심리적 쌍둥이인 아이가 부모의 모습을 반영한 사진들이었다. 사진가는 “딸이 엄마의 욕심에 투영되는 모습들이 시각적으로 드러난 닮은꼴을 찾아 다녔다”고 했다.

이선민의 '도계 프로젝트(2007)’. 사진가가 "한 번 앉아보시죠" 하자 아버지가 가운데에 앉고 그 옆에 큰 며느리가 앉고 둘째 며느리가 섰다. 어머니는 방안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 사진가 이선민

어느 날 성묘를 하러 한 줄로 서서 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저걸 찍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사를 지내는 대가족의 모습엔 어떤 질서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도계 프로젝트(2007)’가 시작됐다. 강원도 도계가 고향인 대학원 후배 가족을 찾아갔다. 도계는 성인 남성들의 직업이 대부분이 광부였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질서와 체계가 확고했다. 추석을 맞아 가족들이 모였는데 사진가가 “한번 앉아 보시죠”라고 했더니 가부장적인 질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 앞에 앉은 가족의 중심인 아버지가 앉고 그 옆에 큰며느리가 앉았다. 아들들은 뒤에 서있었고 어머니는 방 안에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선민의 ‘대륙을 횡단하는 여성들(2013)’ 연작은 우리 사회에 증가하는 다문화 가족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유모차를 끌고 있는 엄마 뒤로 작은 용달차 한 대에 이삿짐 전부가 실려있었다. / 사진가 이선민

‘대륙을 횡단하는 여성들(2013)’은 사진 의뢰를 받아 다문화 가정 특집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경기도 성남에서 이사 중인 캄보디아 며느리를 보고 시작했다. 놀라운 건 용달차 하나 정도가 가족의 짐 전부였다. 얼굴도 모르고 남편 전화번호만 갖고 바다를 건너 시집온 며느리들은 코리안 드림을 꿈꿨었다. 사진가는 “문화적인 간극이 너무 커서 이들을 대상화해서 촬영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선민의 'MZ in 을지로(2022)' 연작, 한국의 세대를 탐구해온 작가의 최근 관심은 을지로 낡은 건물에 살며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MZ세대들이다./ 사진가 이선민

MZ들을 만나 기록하다

이선민은 요즘 서울 을지로 골목을 자주 찾고 있다. 오래된 을지로 뒷골목에 사는 MZ세대 프로젝트를 위해서다. 사진가의 관심이 다음 세대로 넘어간 것이다. 을지로 4가 금속제조지구의 낡은 건물들 안에 살고 있는 20대들을 만났다. 밖에서 보면 1, 2층은 공구나 재료들이 쌓여 있지만 4층 정도를 가면 완전히 다른 공간에 힙한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다. 열악한 고시원은 가기 싫고 공유 작업실과 주거 공간이 필요한 20, 30대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만난 MZ세대들은 옷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여주려고 한다. 촬영 섭외에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이선민의 'MZ in 을지로(2022)' 연작, 을지로 뒷골목 낡은 건물 윗층에는 이렇게 전혀 다른 MZ들의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사진가 이선민

사진가의 사진들은 포트레이트(인물사진, Portrait) 형식이다. 정돈된 사진 속 인물과 공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드러낸다. 이런 사진가의 스타일은 어떻게 정착된 걸까? 그는 인물을 설명하는 공간을 보여주려다 보니 현재의 스타일로 이어졌다고 했다. 사진가는 당분간 을지로와 MZ세대들을 더 볼 것이고, 또 어머니 세대를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사진가의 남편은 엔지니어로 평생 일하다 올해 직장에서 정년 퇴직을 했다. 이선민은 이렇게 관심을 이어가며 25년을 넘게 세대를 관찰하는 사진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2024년 동강국제사진제 올해의 사진가 이선민 / 사진가 이선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