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영 <밤의 집> 연작, 2021. 사진가 손은영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리움을 집으로 표현했다/ 사진가 손은영

어린 시절 날이 어두워지도록 놀아도 우린 걱정이 없었다. 집에서 날 기다리시던 엄마가 있으니까. “들어와 밥 먹어!” 어두운 밤길, 낯선 마을이라도 창밖으로 비추는 불빛이나 대화가 들리면 누구든 가족이 떠오른다. 그토록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가족을 손은영은 ‘집’으로 보여준다. 사진 같은 그림이거나 그림 같은 사진으로.

어두운 밤 집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 달이 비치고 있다. 한 번쯤 어디선가 본 듯한 가로등 아래 불이 환한 골목길의 어느 집. 사진가의 골목길 집들은 놀랍게 선명하고 컬러가 두드러진다. 왜 그럴까? 사진의 디테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손은영은 사진의 사실적 질감과 회화가 표현하는 자유로움을 안다. 대학에선 서양화를, 대학원에서는 사진을 전공했다.

손은영 <밤의 집> 연작, 2021. 사진가 손은영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리움을 집으로 표현했다/ 사진가 손은영

사진가는 2021년 <밤의 집> 연작을 전시하고, 또 다른 집 시리즈인 <기억의 집>을 지난달 서울 송파구 예송미술관에서 전시했다. <기억의 집>은 밤의 집의 야경이 낮으로 바뀌고, 전시 사진들의 크기도 확 커졌다. 지난 2월 16일 전시장을 찾아 사진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사진가가 들려준 사진과 추억에 대한 이야기.

손은영 <밤의 집> 연작, 2021. 사진가 손은영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리움을 집으로 표현했다/ 사진가 손은영

가족이 그립던 어린 시절

어릴 때 가족과 떨어져서 할머니와 살다보니 가족이 늘 그리웠다. 내가 사진으로 보여주는 집들은 이런 가족을 향한 그리움에서 출발했다. 사진에서 따스함을 느끼는 것도 어릴 때 살던 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 항상 아이들 곁에 있는 엄마가 되겠다는 다짐 때문에, 실제로 화가의 꿈을 접고 20년을 엄마로만 살았다. 엄마가 없어도 알아서 잘하는 나이가 되자,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그러기 전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찍어주려고 카메라를 산 건데 아이들이 크면서 피하자 이것저것 찍어보기 시작했다.

손은영은 사진을 촬영한 후 원본을 한 달 넘게 보정해서 그림으로 변형한다. 오른쪽이 어릴적 살던 집과 비슷한 단독 주택 원본사진/ 사진가 손은영, 2021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포토샵을 해보니 어느 날 사진이 회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구도를 잡고 피사체를 강조하는 앵글을 프레임에 배치하고, 레이어로 크기와 컬러까지 조정할 수 있는 포토샵 보정 작업을 해보니 옛날 그림을 그리던 생각이 났다.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도 서로 다른 대상을 촬영하듯 그림도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을 위주로 그린다.

손은영은 사진을 촬영한 후 원본을 한 달 넘게 보정해서 그림으로 변형한다. 오른쪽이 원본 / 사진가 손은영, 2021

사진에서 그림으로

10년 전 강원도 고성에 큰 산불이 나서 많은 집들이 탔다. <검은 집>은 당시에 타버린 집을 찍기 위해 꼬박 1년간 2주에 한 번씩 찾아가서 촬영했다. 당시만 해도 사진의 사실적인 표현을 살려서 작업했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던 때, 나만의 스타일을 어떻게 찾을까 고민했다. 포토샵이란 도구가 붓과 비슷하다고 느낄 때였다. 그림을 그릴 때처럼 사진에 레이어로 조금씩 변형을 해봤다. 색을 바꾸고 질감을 없애거나 형태를 강조하는 식으로 바꿨다. 만족스러웠다.

남원에 사는 어느 분이 <밤의 집(2021)> 전시 때 내 사진을 보고 어린 시절 서울 달동네에 살았는데 형이랑 축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하늘에 걸린 달이랑 똑같다며 한 점 사가기도 했다.

손은영은 사진을 촬영한 후 원본을 한 달 넘게 보정해서 그림으로 변형한다. 왼쪽이 완성된 작품, 오른쪽이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 원본사진/ 사진가 손은영, 2021

내 사진들을 보고 사람들이 처음엔 “새롭고 좋다”거나 “사진인지, 그림인지?” 정도였다가 “저게 뭐냐, 왜 사진을 포토샵으로 망치냐”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개의치 않았다. 그림의 자유로운 표현과 사진의 사실적인 재현을 모두 살리는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집> 연작은 이전보다 더 과감하고 자유로운 변형을 표현한 작업이다. 평소에 쓰던 중형 디지털 1억 화소 카메라와 함께 적외선 카메라로도 촬영했다. 어릴 적 살던 집과 비슷한 느낌의 집이나 동네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촬영한다. 사진 원본이 더 비현실적이다 보니 상상력을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외국 사진가들은 콜라주(collage: 재질이 다른 재료를 써서 표현하는 회화기법) 방식까지도 한다.

감나무집 (2021) / 사진가 손은영

사실적인 사진과 자유로운 그림을 오가며

사진을 회화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은 이렇다. 사진 원본에서 나무의 섬세한 질감이나 시멘트 벽 같은 거친 질감은 대비를 높여서 강조한다. 반면 벽이나 지붕처럼 단순한 면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최대한 질감과 대비, 음영을 일부러 평면적으로 만든다. 그 외에 컬러를 바꾸거나 변형도 한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왜곡된다. 내 기억 속 옛집도 정확한 모습을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비슷한 기억의 집을 찾아 사진을 찍고 일부를 자유롭게 변형한다.

능소화가 있는 천변집 (2022) / 사진가 손은영

붓처럼 자유롭게 사용하는 보정은 포토샵으로 하는데, 사실 촬영보다 보정이 훨씬 오래 걸린다. 한 장에 처음엔 3개월간 꼬박 매달려서 보정했다. 지금은 숙달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진 한 장을 갖고 완성할 때까지 한 달에서 한 달 반이 걸린다. <밤의 집>은 3년, <기억의 집>은 꼬박 2년이 걸렸다. 사진 속에 사람들이 없는 것은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다음 작업도 집인데 밖이 아니라 집 안의 모습을 해보려고 한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손은영 사진가는 20년 동안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는 엄마로 살다 돌아와 붓대신 카메라를 들고 사진가로 활발한 작업을 하고 있다/ 손은영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