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바위 하나가 물속에서 헤엄쳐오더니 눈이 마주쳤다. 고래였다. 혹등고래(humpback whale)는 사진가 장남원을 보며 쌍꺼풀의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고래를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사진가는 덜컥 겁이 났다. ‘물면 어떡하지?’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은 그는 배로 돌아왔다. 배에서 쉬는 동안 계속 고래 눈만 생각났다. 1992년 일본 자마미(Zamami)섬 앞바다에서 고래를 처음 본 순간을 사진가는 기자에게 생생히 들려주었다.
‘물려도 찍겠다’는 생각에 다시 갔다. 카메라에 20mm 단 렌즈로 6장만 찍고 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고래만 생각났다. 고래를 찍었다는 행복감에 사진가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고 했다. 고래를 본 것은 장남원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고래와 만남
지난해 OTT드라마 인기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이 상상하던 고래를 큰 사진으로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사진가가 촬영한 혹등고래였다. 지난해 롯데월드타워 전시 후 알려지면서 담당 프로듀서가 직접 사진가를 찾아와 고른 고래 사진 중 한 장이었다. 사진가의 40년이 넘는 수중촬영 경력 가운데 고래 사진도 30년이 넘었다.
시커먼 등에 허연 배를 드러낸 혹등고래 한 마리가 카메라 앞에서 수영한다. 고래는 회오리 같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지느러미를 돌리기도 한다. 사진가를 알고 마치 포즈를 취하는 모델처럼 보인다. 흑백의 고래 사진은 국내 유일의 고래사진가 장남원이 몇 년 전 남태평양 통가 바다에서 찍은 작품들이다.
바다 속에서 보는 야생 고래들은 수족관의 돌고래나 가끔 그물에 걸려 죽는 밍크 고래와는 다르다. 우선 크기에 압도되고 그 거대한 생명체가 헤엄치면서 “우우 우우”하는 황소 울음소리도 오싹하다. 전 세계에 고래는 100여종이 있지만 그중 촬영이 가능할 정도로 수면에 올라오는 것은 혹등고래뿐이다. 혹등고래는 거칠게 생긴 외양과 다르게 유순한 성격으로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
혹등고래는 남태평양 통가왕국 앞바다에 4개월간 모인다. 따뜻한 수온에서 새끼를 키우기 위해 7월부터 10월까지 머무르는데 이 시기에 고래 사진을 찍는다. 그 후 고래는 10월 말이면 6천 6백km를 남쪽으로 몇 달간 헤엄쳐서 새우 같은 갑각류 먹이가 풍부한 남극으로 간다. 겨울을 난 고래들은 여름이면 다시 올라오는데, 그동안 바다의 최강 포식자인 범고래나 상어 등의 공격을 받는다. 이들은 고래 새끼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어미는 필사적으로 지킨다.
그렇게 먼 바다를 헤엄쳐간 끝에 도착한 남극에는 포경선이 기다리고 있다. 사실 고래는 멸종위기 등급 동물이다. 그래서 고래를 잡는 것은 국제규약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도 누가 고래를 잡나? 일본이나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은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아가면서 여전히 고래를 잡는다. 고래에서 나오는 고기나 기름, 뼈, 수염 등에 대해 이 나라들은 여전히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수많은 난관을 뚫어야 찍는 고래 사진
사실 고래 사진은 찍기가 어렵다. 멸종위기종이라서 30미터 이내로 사람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물속은 망원렌즈 촬영이 어렵다. 바닷속 밝기나 투명도 때문이다. 또 고래가 놀랄까 봐 산소 장비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카메라를 들고 맨몸으로 들어간다. 설령 산소 장비를 메도 고래의 속도를 못 따라간다. 장비를 메면 천천히 쉬면서 올라오는 감압을 해야 수중병에 걸리지 않는다.
고래사진가들은 장비 없이도 1분에 10미터까지 수중에 내려가서 찍는데 혹등고래는 수심이 낮은 수면까지 올라오기 때문에 촬영이 가능하다. 20미터가 되는 향유고래나 30미터가 넘는 대왕고래는 수면으로 올라오지 않고 깊은 바닷속에서 지나가기 때문에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긴 어렵다.
고래 사진가들은 보통 현지에서 오전엔 먼바다를 가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오후엔 섬과 섬 사이에 있는 새끼와 어미 고래를 촬영하러 간다. 그렇지만 고래 사진 촬영은 굉장히 어렵다. 출발 전부터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장남원은 고래를 찍기 위해 한달 전부터 하체 지구력을 키우는 운동을 한다. 체력도 문제지만 사실 경비도 많이 든다.
통상 현지에서 보름간 현지에서 머물며 배를 빌려 수중 촬영을 하러 바다로 나가는데, 하루에 배 값만 150만원 정도 드는데 같이 사진을 찍는 외국 사진가들과 나눠도 전체 경비는 천만원을 훌쩍 넘긴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진가들은 항공료라도 벌기 위해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고래 관광 투어를 여행상품으로 모집한다.
수중사진에서 시작된 새로운 길
그는 어떻게 고래를 찍는 사진가가 되었을까? 장남원은 20년간 일간지 사진기자로 일했다. 대학 때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영화에서 본 사진기자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였다. 사진부 암실에서 선배들의 필름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선배들이 촬영한 수중사진 필름들을 발견했다. 해군 출신이라 평소 수중 생물에 관심이 있었다. 필름을 보며 ‘이거 내가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6개월간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수중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엔 놀러가는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수중에서 카메라를 처음 들었을 땐 중심도 못 잡았다고 했다.
하나에 꽂히면 집중하는 성격인 사진가는 당시 접사 렌즈만 들고 국내 스쿠버 사진가들이 찍는 사진엔 관심이 없었다. 외국 사진가들은 어떻게 찍는지 궁금해서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 팔던 수중사진 잡지를 열심히 사서 보며 새로운 앵글들을 연구했다. 결국 수중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강원도 바닷가에서 산호를 찍어서 신문에 썼다. 16mm 광각 렌즈로 피사체에 가깝게 가서 넓게 풍경을 보여주며 찍었다. 국내 수중사진에 표준 렌즈처럼 된 16mm 렌즈는 장남원이 80년대 초에 처음 촬영한 이후 앵글이 보편화되었다.
수중사진에서는 16mm나 14-24mm 줌 렌즈가 주로 사용된다. 사진가는 니콘의 니코노스라는 수중전문카메라로 많이 촬영했다. 더 많은 수중사진을 찍기 위해 회사에 비싼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보고서를 썼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이걸 왜 사야 하는지 회사에서 타당한 이유를 보고서로 작성하라고 하자,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우리나라는 육지보다 바다에 사는 생명이 많아 볼거리가 많은 수중사진을 위한 촬영장비가 꼭 필요하다’면서 구라를 쳐서 결국 해외에서 수입한 수중촬영 장비로 열심히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하지만 고래를 본 후엔 자신을 쳐다보던 그 눈이 잊히지가 않았다. 계속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고래를 찍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 사진가는 31년간 고래를 찍었다. 처음 고래를 찍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너무 뿌듯했다고 한다. 당시 사진은 모두 필름이라서 현지에서 현상도 못했다. 고래를 찍었다는 뿌듯함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돌아와서 필름을 현상을 해보니 엉망이었지만, 엉망이 된 사진들도 좋았다.
지루한 사진은 남기지 마라
올해 73세인 사진가는 자신이 언제까지 수중에서 고래를 찍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사진가는 7년 전 멕시코 수중 동굴에서 촬영하다 물을 먹고 패혈증에 걸려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두 달간 병원에서 항생제가 든 링거를 매일 8병씩 맞았다. 두 달간 490병의 항생제를 맞고 두 번의 수술을 거쳐 겨우 살아나서 4개월 만에 퇴원했더니 몸에 근육이 빠져서 통가를 갔다가 오리발도 힘이 들어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육상사진’도 찍고 있다. 수중사진이 전문이라 사진가는 땅에서 찍는 사진을 이렇게 부른다고 했다. 아직 눈이나 나무 같은 풍경이 위주이지만 점점 피사체를 옮겨가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체력을 회복해서 곧 통가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진을 위해서 뭐가 필요한지 물었다. 그는 우선 사진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해외 사진가들의 유튜브를 6개월간 열심히 찾아보니 무명의 실력 있는 사진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남원은 보는 사람이 지루한 사진은 남기지 말라고 충고했다.
사진가들은 대부분 자기 사진이 왜 인기가 없는지 이유를 모르는데 그건 목표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몇 달 동안 뭐만 찍었다고 하고 끝나면 그건 자기만족이라는 것이다. 사진가들은 이걸 기록으로 찍는 것인지 아니면 팔리는 사진으로 찍는 것인지로 분명한 구분을 짓고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진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경험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지루한 사진은 남기지 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