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분홍이다. 소녀들의 침대와 이불, 가방과 원피스, 인형과 머리핀, 필통과 연필, 치약까지 모두 핑크다. 유치원 소녀들이 가진 물건을 모으니 눈이 시릴 정도로 핑크 천지다. 반면 또래 남아들은 전부 파랑이다. 여기서 질문, 왜 소녀들은 다 분홍이고 소년들은 파랑일까? 태어날 때부터 소녀들은 분홍, 소년들은 파랑을 찾나?
사진가 윤정미는 2004년 집에서 딸 아이 사진을 찍어주다가 이상한 걸 발견한다. 핑크색 옷을 입고 핑크색 훌라후프를 돌리는 딸 뒤로 쌓여 있던 장난감이 전부 핑크색이었다. 먼 친척 딸이 커서 아이한테 물려준 옷과 장난감도 대부분 분홍색이었다.
‘내 딸만 그런가?’가 궁금해서 아이 친구들의 옷과 가방을 보니 약속한 듯이 분홍의 물결이었다. 누군가 아이 사진을 찍어 달래서 그 집에 가보면 엄마들이 “우리 집에 핑크색이 이렇게 많네!”라며 놀랬다.
한번은 그녀의 아들이 초등학생 때 30cm 자를 준비물로 학교에 갖고 가야 했다. 함께 동네 문방구를 갔더니 남은 자가 핑크색밖에 없어서 “이거라도 갖고 갈래?”라고 묻자 싫다고 했다. 분홍색을 가지고 가면 분명히 친구들이 놀릴 거라고 했다.
우리나라만 그런지도 사진가는 궁금했다. 이듬해 가족과 함께 미국을 간 사진가는 뉴욕 대형 마트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본다. 소녀들이 좋아하는 인형 놀이 장난감은 핑크, 소년들이 갖고 노는 자동차나 히어로, 로봇들은 블루가 많았다. 인종들이 섞여 있는 뉴욕 맨해튼의 유치원도 신발부터 머리까지 소녀들은 핑크, 소년들은 블루였다.
2005년 미국의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던 윤정미는 오랫동안 질문하던 이것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연작 사진으로 알려진 윤정미의 ‘핑크 앤 블루 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사진가는 핑크블루 사진으로 국내외를 합쳐 100번이 넘는 사진 전시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룩인사이드 갤러리에서는 개관 초대전으로 윤정미의 핑크블루 최근 사진들과 반려동물 사진들이 오는 3월 12일까지 전시 중이다.
핑크블루 사진들은 세계 유수의 신문과 잡지, 방송에도 소개되었다. 2007년 라이프(LIFE)지의 표지로 소개되었고, 뉴욕타임스와 내셔널지오그래피 등에 기사와 사진이, 2012년엔 사진가가 직접 테드(TED) 강연 연사로 나오기도 했다. 사진가는 그만하고 싶어도 요즘도 계속 전시 요청이 들어온다고 했다. 외국에서 그녀의 사진들이 소개되는 교과서나 잡지엔 현대 산업의 공산품이나 환경, 성별에 따른 문화나 관습 등의 이야기와 담론들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좋아하는 색은 변한다
“핑크색은 유치해, 아직도 핑크색 입는 애가 있더라.” 아이가 크면서 어느 날 핑크색을 멀리한다고 했다. 유치원 소녀들은 초등학생이 되면 핑크색을 멀리하고 보라색이나 하늘색으로 옮겨간다. 크면서 자아가 형성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찾는다. 사진가는 자라면서 보라색을 찾는 딸을 보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다른 아이들도 크면서 좋아하는 색이 달라지는 것을 기록했다. 첫 작업을 끝내고 전시회로 크게 유명해졌지만, 사진가는 계속 찍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특정 색을 버리고 새로운 색을 찾는다. 알록달록한 것을 좋아하거나 정반대 색을 택한다. 쌍둥이를 찍었는데, 똑같은 색을 좋아하는 쌍둥이도 있지만 다른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사진가는 아이들이 커서 직접 돈을 벌면 컬러를 선택하는 종류도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사진 속 아이들이 크면서 물건들 배치나 포즈가 다른 이유를 물었다. 사진가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어릴 때처럼 포즈를 취하고 찍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촬영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언젠가 디자인 일을 하는 친구한테 왜 이런 특정 색 옷만 만드는지를 물었다. 친구는 아이들이 특정 색이 아니면 안 사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빈부의 차이에 따른 색의 차이도 있었다. 사진가는 고급 백화점을 가면 아이들 유명 브랜드엔 다양한 색의 물건이 있지만 저렴한 물건을 파는 대형마트에는 색의 종류가 훨씬 단순하다고 했다. 결국 특정 색을 좋아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컬러가 몇 개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꾸준한 작업은 필요에 의해 계속된다
‘정말 저 많은 핑크가 전부 아이 것일까? 어디서 사온 건 아닐까?’
처음 사진을 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갖는다. 사진가는 촬영 때문에 일부러 사오거나 빌려와 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자기 것들로만 촬영했다고 밝혔다. 또, 분홍색 자체만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장난감이나 물건들이 있나에 놀라기도 한다. 사진가는 물건이 적은 집은 2, 3시간 세팅하고 사진을 찍었고, 물건이 많은 집은 아침에 해서 점심 얻어먹고 저녁때 끝내는 경우도 있었다. 평균 4시간에서 많으면 8시간을 준비하고, 촬영은 30분에서 한 시간 내로 끝냈다. 물건을 펼쳐놓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진을 찍고 아이들에게 찍은 사진들을 선물했다.
사진가는 2005년과 2006년, 2009년, 2015년에 걸쳐 자신의 딸을 포함해 15명을 모두 네 번씩 다시 찍었다. 처음 시작할 땐 전단지를 만들어 찍을 모델을 모집했다. 미국인들은 전단지를 보더니 재밌겠다고 해서 지원자들이 금방 섭외되었고, 한국인들은 주변 사람들 위주로 촬영했다. 처음엔 50명이 넘는 아이들을 찍었고 현재는 70여명을 계속 찍고 있다. 사진이 계속 소개되다 보니 지금도 핑크 블루 시리즈는 찍고 있다. 아이들이 크면 특별한 색은 사라지지만, 요즘도 해외에서 전시 요청이 와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가는 물건 자체를 골고루 보여주려고 글로브 디퓨저를 써서 촬영하는데 초기에는 아이들도 오브제처럼 보이게 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찍고 있다 했다. 처음엔 핫셀브라드 필름 카메라를 쓰다가 요즘은 6천만 화소짜리 페이지원으로 찍고 정방형 포맷으로 트리밍하고 있다.
한때 빨간색이 공산주의 깃발이 연상되어 기피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빨강은 보수를 상징하는 색이 됐다. 미국도 공화당은 레드, 민주당은 블루가 대표한다. 노란색도 여러 의미를 담고 있지만, 어느덧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상징이 되었다. 1914년 미국 선데이 센티널 신문에는 남성들에게 레드를, 여성에게는 블루 컬러를 권하라는 기사도 있었다. 사진가는 이렇게 문화와 역사, 집단의 기억으로 색의 의미가 변해도 소녀와 소년을 가르는 핑크와 블루는 여전하다고 했다.
반면 윤정미는 다른 사진들도 꾸준히 찍고 있다. 어느 날 개를 산책하러 나갔다가 동네 사람이 사진가에게 “개가 주인을 닮았다”는 말을 듣고 반려동물 연작을 2014년부터 찍었다. 주인과 개가 살아가면서 비슷해지는 모습이 재밌어서 찍었다.
개와 고양이, 도마뱀, 햄스터 등의 반려동물 뿐 아니라 ‘반려식물’도 찍었다. 코로나 이후에 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어린이나 어른이 갖고 있는 ‘애착인형’ 시리즈도 있다. 인형이나 이불은 후각적인 기억이 큰데 이불 끝의 냄새를 맡는 아이도 있다. 또,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직원들의 옷이 공간에 맞게 동화되는 모습도 촬영하고 있다.
사진가는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이제껏 사진들의 발상이 궁금했다. “나는 사진을 찍고 나서 보이는 것이 많았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뭐든지 글로 쓰라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 단어라도 써오라고 한다. 얘기하고 생각만 하면 모든 게 허공에 흩어지고 날아간다. 하지만 쓰면 생각을 묶어놓고 계속할 수 있다”고 답했다. 가령 영화나 신문을 보다가도 뭔가 꽂히는 게 있으면 무조건 기록하는 게 중요하고, 지금 생각하는 게 별것 아닌 것일 수 있지만, 생각이 생각을 거듭해서 언젠가는 창작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하나도 없고 모두 출발은 일상에서 시작한다. 대학 때 수첩에 뭔가를 써놓은 게 있는데 그걸 보고 스스로 놀랐다. 지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서. 그래서 학생들한테 조그마한 아이디어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거기에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라고 한다”고도 했다.
모든 것은 다 작은 데서 출발한다. 핑크색 옷과 장난감만 있던 딸, 개가 주인을 닮았다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사진을 찍고 나서 발견하는 것도 많았다고 했다. 찍고 나서 보면 찍을 때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고.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다 보면 재밌는 요소를 발견할 기회도 많다고 했다.
“무조건 일단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자꾸 찍으면서 보면, 이게 뭔가 나올 지 안 나올지를 안다. 그는 세팅하면서 1시간은 찍어야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홍익대 대학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진가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3개 이상의 아이디어를 갖고 오라고 한다. 정말 별거 아닌데 이걸 오래할 경우 어떻게 나올지도 묻는다. 사진은 다른 예술과 달리 동시에 여러 개가 가능하다. 장기적으로 하는 것과 집중해서 마음먹고 하는 것으로 적어도 두 개 이상으로. 그리고 뭔가를 계속한다는 게 중요하다. 사진은 한장만 갖고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하는 것도 중요하다. 꾸준히 정성을 다해서 하면 뭔가는 나오더라. 그래서 여러 장을 오래 찍어야 한다. 최소 1, 2년은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