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진출을 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직행한 영건들의 최근 활약이 더디다. KBO(한국야구위원회) 리그를 거치지 않은 선수 중에선 2022년 배지환(26·피츠버그 파이리츠) 이후 빅리그 무대를 밟은 새 얼굴이 없다. 고립무원(孤立無援)에 가까운 마이너리그에서도 살아남아 MLB 무대를 호령했던 박찬호, 김병현 신화가 희미해지는 모양새다.

그래픽=이철원

2019년 서울고를 졸업하고 계약금 30만달러(약 4억1500만원)에 LA 다저스로 향한 최현일(25)은 올해 워싱턴 내셔널스 산하 마이너리그 트리플A 소속으로 4경기에서 3패 평균자책점 15.12(28일 기준)로 부진하다. 작년 다저스 산하 트리플A팀에서 15경기 4승 6패 평균자책점 4.28로 일정 궤도에 오른 듯한 활약을 보여줬지만 다시 흔들리고 있다. 벌써 미국 생활 7년 차인데도 승격이 요원하다. 같은 서울고 출신 이찬솔(20·보스턴 레드삭스)도 2024년 데뷔 이후 마이너리그 최하위 리그인 루키리그에서 2경기 등판에 그치고 있다.

2023년 계약금 75만달러(약 10억3200만원)에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향한 덕수고 출신 ‘초고교급’ 심준석도 미국 진출 이후 내내 루키리그를 못 벗어나고 있다. 입단 당시 160km에 육박하는 속구는 MLB 평균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팔·어깨 등 고질적인 부상이 거듭되며 경기 자체를 잘 못 뛰고 있다. 2023년에는 4경기에서 8이닝을 던지는 데 그쳤고, 2024년엔 어깨 부상으로 아예 시즌을 쉬었다. 올해는 마이애미 말린스 산하 마이너팀 소속으로 4경기에 나와 1패 평균자책점 9.82로 헤매고 있다.

타자 유망주들도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MLB 무대를 밟은 배지환을 제외하곤 더블A 이상 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전무하다. 2020년 전 세계 아마추어 타자 유망주들이 모이는 ‘파워 쇼케이스’에서 홈런왕을 차지해 주목을 모았던 조원빈(2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은 2022년 서울컨벤션고를 졸업하고 미국행을 택했다. 계약금은 50만달러(약 6억9000만원). 2023년 싱글A에서 105경기 타율 0.270, 7홈런, OPS(출루율+장타율) 0.765로 가능성을 보이는 듯했지만 올해 상위 싱글A 22경기에서 타율 0.149, OPS 0.455에 그치는 중이다. 작년에도 상위 싱글A 107경기에서 타율 0.227, 2홈런, OPS 0.612로 부진했다. MLB 첫 한국인 포수를 꿈꾸는 엄형찬(21·캔자스시티 로열스)도 싱글A 타율 0.172, OPS 0.466으로 기대에 못 미친다. 신우열(24·탬파베이 레이스), 최병용(23·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 한국 고교, 미국 대학을 거쳐 MLB 신인 선발로 입단한 타자들도 싱글 A에서 1~2할 초반대 타율로 잠잠하다.

그나마 지난해 계약금 90만달러(약 12억4000만원) 대우를 받고 다저스로 건너갔던 장현석(21)이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올해 싱글A에서 꾸준히 선발로 등판하며 10경기 1패 평균자책점 4.96 성적을 내고 있다. 160km에 육박하는 속구 위력이 상당해 피안타율이 0.167에 불과하다. 작년에도 시즌 막판 싱글A로 승격해서 5경기 평균자책점 2.19로 호투하는 등 성장세가 빠르다. 올해 시즌 전 다저스 투수 유망주 7위에 오르기도 했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멤버라 병역 문제도 일찍 해결했다.

야구계에선 최근 미국으로 건너가는 선수들의 질적 수준이 과거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 고교 야구 감독은 “몇 년 전만 해도 1라운드급 유망주들은 바로 MLB에 가려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선수들도 대부분 국내를 경험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MLB 전문가인 송재우 MBC 스포츠 해설위원도 “MLB에서 상위 유망주를 가르는 척도로 꼽히는 100만달러 이상 계약금을 받고 건너간 한국 선수들이 최근에는 드물다”고 했다. 실제로 올해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한 ‘투타 겸업’ 선수 김성준(18)이 계약금 120만달러(약 16억5000만원)를 받았는데, 2017년 배지환(125만달러) 이후 8년 만에 나온 100만달러 이상 계약금이다.

현지 적응, 병역 문제, KBO리그 참가 제한 등 걸림돌도 있고, 최근에는 이정후 등 KBO리그를 거쳐도 1억달러 이상의 대형 계약을 맺고 안정적으로 MLB 무대를 밟는 경우도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으로 직행한 선배 선수들이 잇따라 실패를 경험한 것도 한몫했다. 대표적으로 2014년 116만달러(약 16억원)에 명문 뉴욕 양키스에 입단해 화제를 모았던 유망주 박효준은 2021~2022년 2년간 MLB 무대를 밟긴 했지만, 애매한 활약으로 현재 뛸 팀도 찾지 못한 무적 상태다. 작년에는 병무청으로부터 병역 기피자로 지정되는 등 수렁에 빠져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수퍼스타’ 오타니 쇼헤이도 고교 졸업 후 미국 진출을 꾀했지만, 일본프로야구(NPB)에서 5시즌을 채우고 미국으로 건너와 실력이 만개했다. 올해 다저스에 입단한 대형 유망주 사사키 로키도 같은 길을 걸었다. 현재 MLB에서 활약하는 센가 고다이, 야마모토 요시노부, 스즈키 세이야 등 대부분 일본 선수들이 모두 NPB 출신이다. 다만 올해 고교야구에서 ‘제2의 오타니’로 꼽히던 모리이 쇼타로가 애슬레틱스와 151만500달러(약 20억8000만원)에 계약하는 등 여전히 고교 선수들의 미국 직행은 이뤄지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