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3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올 시즌을 영화로 만든다고 한다고 한다면 너무 극적인 요소가 많아 작위적이란 얘기까지 나올 만하다. 그만큼 김광현의 2020시즌은 다사다난했고,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해피엔딩’에 가깝다. 수많은 위기를 딛고 김광현은 보란 듯 올해를 멋지게 보냈다.
◇ 우여곡절 끝에 입은 카디널스 유니폼
빅리그 진출부터 쉽지는 않았다. 2014시즌이 끝나고 그는 포스팅시스템(비공개입찰경쟁)을 통해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당시 200만달러의 포스팅 금액으로 독점 교섭권을 따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김광현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연봉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파드리스가 제시한 연봉은 100만달러로 홀대에 가까웠다. 계약 기간도 짧았고, 메이저리그 로스터 보장도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김광현은 SK로 다시 돌아왔다. 팔꿈치 수술로 2017시즌을 통째로 날렸지만, 이듬해 팀의 에이스로 네 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2019시즌이 끝나고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다.
2021년까지 FA 계약 기간이 남은 터라 SK는 처음엔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전력 약화의 우려에도 SK 팬들부터 “김광현을 미국으로 보내자”고 나섰다. 야구팬들의 뜨거운 성원에 SK 구단도 김광현의 미국 진출을 허락하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김광현은 작년 12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2년간 800만달러(약 94억원)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KIM KWANG HYUN’이란 이름에서 딴 별칭 ‘KK’는 삼진을 많이 잡는다는 의미도 됐다.
김광현은 시범경기부터 잘 던졌다. 네 번의 시범경기 등판에서 8이닝 5피안타 11탈삼진 무실점, 평균자책점 0.00의 완벽한 모의고사 성적표를 만들었다. 직구와 슬라이더만 잘 던지는 ‘투(two) 피치’ 투수에서 벗어나 위력적인 커브를 선보였다.
시범경기를 치르며 팀 내 4~5선발 경쟁에서도 우위를 보였다. 선발로 25경기를 뛰면 100만달러를 추가로 받는 인센티브 옵션을 채울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 코로나로 메이저리그가 멈췄다
김광현이 한창 메이저리그 등판의 꿈을 키울 무렵 코로나가 세상을 덮쳤다. 메이저리그 일정이 ‘올 스톱’됐다. 시범경기 호투로 좋은 흐름을 이어갔던 김광현으로선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카디널스의 스프링캠프 훈련지였던 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외롭게 훈련했던 그는 4월부터 세인트루이스 홈구장인 부시 스타디움에서 훈련을 이어갔다. 가족의 품이 그리웠지만 향후 출입국에 문제가 생길까 봐 미국을 떠날 수도 없었다. 김광현은 소셜미디어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수없이 되뇌어도 위로가 되질 않는다. 어떠한 시련이 있어도 잘 참고 견뎌낼 줄 알았는데 힘들다. 앞으로 다가올 더 큰 행복과 행운을 위해 지금부터 준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2020 메이저리그는 결국 팀당 60경기씩 치르는 일정으로 7월 24일 막을 올렸다. 줄어든 경기 수만큼 김광현의 연봉은 148만달러로 깎였다. 시간이 흘러 선발 로테이션에도 변화가 생겨 김광현은 불펜 요원으로 시즌 개막을 맞이했다. 그때만 해도 운이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 데뷔전을 마무리 투수로
김광현은 25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홈 개막전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팀이 5-2로 앞선 9회초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마무리 상황에서 치른 투수는 얼마나 될까. 더구나 김광현은 KBO리그에서 13시즌을 뛰며 세이브가 하나도 없던 투수였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은 벨을 맞아 3루 땅볼을 유도했지만 실책이 나오며 진루를 허용했다. 모란에 2루타를 맞은 그는 오수나에게도 적시타를 허용하며 2점을 실점(1자책점)했다. 야구팬들이 ‘역시 메이저리그의 벽은 높구나’라고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마운드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김광현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김광현은 승리를 날리지 않았다. 에레디아를 우익수 라이너, 스탈링을 병살타로 처리하며 팀의 5대4 승리를 지켜냈다. 메이저리그 통산 첫 등판에 첫 세이브를 올렸다. 지나고 보니 이때 완전히 무너졌더라면 김광현이 올해와 같은 성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어쨌든 첫 단추를 잘 꿰었다.
◇선발로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네
개막을 앞두고 김광현에게 큰 시련을 안겼던 코로나는 또다시 변수가 됐다. 카디널스에 코로나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이번엔 코로나가 기회를 줬다. 김광현이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것이다. 그는 8월 18일 시카고 컵스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3과 3분의 2이닝을 3피안타 1실점(1탈삼진)으로 막으며 합격점을 받았다.
김광현은 두 번째 선발 등판인 23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6이닝 동안 공 83개를 던져 무사사구 3탈삼진 무실점을 기록, 메이저리그 첫 승의 감격을 누렸다. 그는 “IMF 때 박찬호 선배와 박세리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 확산으로 힘든 국민께 힘을 드리고 싶었다”며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마운드에 올라 승리까지 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김광현은 잘 살렸다. 28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전에서도 6이닝 1실점(비자책)으로 잘 던졌다. 네 번째 선발 등판인 9월 2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선 5이닝 4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2승째를 챙겼다.
그때부터 김광현의 평균자책점에 시선이 쏠렸다. 그는 평균자책점 0.83으로 신인왕 레이스에도 뛰어들었다. 선발 4경기만 따지면 0.44로 메이저리그가 평균자책점을 공식 집계한 1913년 이후 좌투수의 데뷔 후 선발 4경기 평균자책점 역대 2위 기록이었다.
‘메이저리그에 통하기엔 공이 느리다’ ‘한국에서도 제구력이 불안했다’ ‘구종이 단조롭다’ 등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쏟아졌던 우려는 실력으로 잠재웠다.
김광현은 직구 평균 구속이 145km에 그쳤지만 명포수 야디에르 몰리나의 리드에 따라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에 공을 꽂았다. 빠른 템포로 공을 던지며 상대 타자를 몰아붙이며 상대 리듬을 빼앗았다. 주무기인 명품 슬라이더는 구속 변화를 10~20km가량 주면서 타자를 속였다.
◇ 신장경색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한창 잘 나가던 김광현에게 또 시련이 닥친 것은 9월 초. 원정 경기를 위해 방문한 시카고에서 극심한 복통을 호소해 응급실로 이송됐다. 카디널스 구단은 “김광현이 신장경색 진단을 받았다. 열흘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고 밝혔다. 김광현은 2010년엔 뇌경색 증세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 팬들의 걱정이 컸다.
다행히 치료를 잘 받고 돌아온 김광현은 9월 15일 두산의 에이스였던 조시 린드블럼(밀워키 브루어스)과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아팠던 터라 팬들도 마음을 비우고 봤지만, 그는 보란 듯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혈전 용해제를 먹기 시작했지만 야구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며 “다시 돌아와 공을 던질 수 있어 행복하다. 돈 워리(Don’t worry·걱정 말라)”라고 말했다.
9월 25일은 한국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 됐다. 김광현과 류현진(33·토론토 블루제이스)이 메이저리그 동반 승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시즌 3승째를 거뒀다. 류현진은 같은 날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5승(2패)을 올렸다.
이날은 두 선수의 정규리그 마지막 등판이기도 했다. 이로써 김광현은 3승1세이브, 평균자책점 1.62의 성적으로 2020시즌 정규리그를 마감했다. 올 시즌 3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중엔 평균자책점이 가장 낮았다. 코로나로 시즌이 밀리고 혼자 훈련을 이어가며 고군분투할 때만 해도 김광현이 이렇게 좋은 성적으로 올 시즌을 보낼 것이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엄연히 메이저리그에선 루키 신분이었지만, 놀라운 적응력을 선보이며 기념비적인 정규리그 성적을 남겼다.
◇ 가을의 사나이, 여기 있소
아직 김광현의 2020시즌은 끝나지 않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가을 야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월드시리즈에서 11회 우승하며 뉴욕 양키스(27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우승 횟수를 자랑하는 명문 카디널스는 2011년 이후 9년 만의 우승에 도전한다.
카디널스의 와일드카드 시리즈(3전2선승제) 상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카디널스는 1일 오전 6시8분부터 열리는 1차전 선발로 김광현을 예고했다.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마무리로 나와 세이브를 기록한 루키가 포스트시즌 1선발로 나서는 영화 같은 스토리가 완성된 것이다.
김광현의 독특한 투구 폼과 짧은 인터벌, 볼 배합 등은 처음 상대하는 파드리스 타자들에겐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더구나 파드리스는 6년 전 입단 협의 과정에서 김광현에게 ‘굴욕’을 안겨준 팀이다. 이번 1차전에서 호투한다면 김광현에겐 그보다 더 통쾌한 ‘복수’가 없을 것이다.
김광현의 지난 1년은 정말 드라마틱했다. 수십번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여기까지 왔다. 팬들은 김광현의 올 시즌을 오래오래 보고 싶어한다. 김광현은 SK 시절 포스트시즌에서 수많은 명장면을 연출한 ‘가을의 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