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코오롱 스포렉스에서 만난 마라톤 국가대표 박민호./고운호 기자

한국 마라톤 황금기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였다. 1970년대생 3인방 이봉주(53·최고 기록 2시간7분20초), 김이용(50·2시간7분49초), 황영조(53·2시간8분9초)를 앞세워 세계 무대를 호령했다. 그러나 그 뒤 펼쳐진 암흑기는 좀처럼 터널의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희미한 희망의 끈은 이제 스물넷 젊은 마라토너 박민호(코오롱)에게서 다시 찾을 수 있다. 그의 최고 기록은 2023 서울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10분13초.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2019년 2시간15분, 2021년 2시간13분, 2022년 2시간11분대에서 2시간10분대까지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기록 상승세가 희망의 단초다.

“목표는 2시간6분대 진입입니다. 곧 달성하리란 확신도 있고요. 그러면 많은 후배가 절 보고 마라톤을 시작하지 않을까요?”

마라톤 국가대표 박민호./고운호 기자

오는 23일 개막하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2시간6분대 진입을 위한 징검다리다. 그는 스물일곱에 2시간6분대를 달성하겠다는 청사진을 세우고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경쟁자들이 한 수 위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승 후보로 바레인의 슈미 데차사(34·2시간6분43초), 일본 이케다 요헤이(25·2시간6분53초)가 꼽힌다. 하지만 당일 컨디션과 주로(走路) 여건, 날씨 등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만큼 기대를 접긴 이르다. 최근 아시안게임 마라톤 우승 기록은 2시간 11~18분대.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는 “우승을 노릴 적기다. 금메달을 따내 마라톤 여정의 새로운 동기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2010년 아시안게임 마라톤 금메달을 딴 지영준(42) 기록은 2시간11분11초였다.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가장 많이 따낸 나라가 한국(7개)이다. 박민호는 그 저력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다.

어린 시절 박민호는 친구들과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그러다 초교 6학년 때 우연히 나간 학교 체육대회 1500m에서 우승했고, 이를 본 체육 선생님 권유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훈련 후 받는 초코 과자 맛은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단거리 전향도 생각했는데 기록을 보니 신통치 않더라. 길은 장거리뿐이었다”며 웃었다. 2013년 선수 4명이 15km를 나눠 달리는 코오롱 구간 마라톤 대회(조선일보·대한육상연맹·KBS·코오롱 공동 주최) 중등부에서 3구간(3km·10분44초) 우승을 차지하는 등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제주(육상)에서 물건이 하나 나왔다”는 찬사를 받으며 좀 더 큰 도약을 위해 제주 남녕고에서 장거리 명문이라는 서울 배문고로 유학을 떠났다.

호사다마랄까. 한창 기량을 꽃피워야 할 시기에 근육 파열과 피로 골절 등 잦은 부상이 괴롭혔다. 고교 3학년, 대학 진학이란 눈앞 과제를 위해 아픈 걸 참고 달렸는데 이 때문에 몸이 더 상했다. 성적도 저조했다. 한때 “달리기가 내 길이 아닌 건 아닐까 고민하느라 정신도 피폐해졌다”고 말했다.

2022년 10월 23일 치러진 춘천마라톤에서 박민호가 엘리트 부문 1위로 골인하고 있다./이태경 기자

대학(계명대)에는 들어갔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6개월가량 운동화를 벗고 방황했다. 술도 자주 마셨다. 집에서 “다시 운동하자”고 붙잡았지만 영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그러다 고교 시절 자신을 뒤쫓던 친구가 전국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곤 정신을 차렸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면서 “‘친구들이 열심히 달렸을 때 나는 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러닝머신에 올라 6개월 치열하게 달렸다. ‘나를 괴롭혔던 문제 원인이 뭘까’ 고민하면서 신체적 능력을 극대화하고 부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무작정 장거리로 무리하기보다, 짧은 거리를 자주 달리며 주법(走法)에 집중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그러다 달릴 때 상체가 너무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세가 꼿꼿하지 않으니 허벅지, 골반에 무리가 갔고 이는 부상으로 이어졌던 것. 이후 주법 교정에 전념하면서 근력 운동으로 내구성도 키웠다. 탄산음료를 끊고 식단 관리도 철저히 했다. 이제야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된 느낌이었다. 주법을 교정하니 부상도 차츰 자취를 감췄고, 하프마라톤 기록을 15분이나 당기는 등 성과도 나오니 운동에 재미가 붙었다. 무기력한 방황을 마치고 난 다음엔 매주 210~220km를 뛸 정도로 달리기를 그 자체로 즐겼다. 오후 10시 자고 오전 5시 일어나 운동 준비를 하는 일과를 철저히 지키자 무섭게 기량이 향상됐다.

현 소속팀 코오롱 코치는 그가 어린 시절 우상으로 삼았던 지영준. 한국 마라톤 마지막 영광 세대다. “어린 시절 롤모델에게 배울 수 있는 건 큰 특권 아닐까요? 2시간 6분 목표를 꼭 달성해 코치님과 기쁨을 나누고 싶어요.” 아시안게임 마라톤 경기는 10월 5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