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보>(1~15)=정석(定石)과 포석(布石)은 고수들이 만들어낸 초반 매뉴얼이다. 흑백 쌍방이 최선의 수순으로 호각의 절충을 이룰 때 정석 또는 포석의 지위를 얻는다. 정석·포석의 초반 과정을 구현하기 위해 반상에 투입되는 흑백 돌들은 언제 보아도 늠름하다. 아군 진지를 구축하고 판의 골격을 만들어 세우는 모습이 숨 쉬는 생명체처럼 의욕과 활력에 넘친다.
하지만 그들의 설계 역할은 초반에 한정된다. 중반 전투 모드로 넘어가 반상에 흙먼지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포석의 흔적은 마구 씻겨 나간다. 형체가 희미해지거나 아예 사라질 때도 많다. 어차피 후속부대가 안착할 때까지 버팀목이 돼주는 게 정석병(定石兵), 포석병(布石兵)들의 숙명이다. 5~8은 요즘 자주 등장하는 첨단 유행 포석이지만 이 얼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아무도 모른다.
9로 걸쳐갔을 때 10은 유장하고 두터운 수법. 이 수로는 참고도 1로 협공할 수도 있다. 그랬으면 이하 10까지 급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13과 14는 맞보는 큰 자리. 노타임으로 진행되던 바둑이 여기서 처음 뜸을 들이더니 2분 만에 15가 놓였다. 누가 두더라도 탐낼 만한 호처다. 여기서부터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포석 허물기’ 작업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