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은(38) 9단은 우리 여성 바둑계의 얼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계 여성 메이저급 대회서 5번 우승, 중국 루이나이웨이와 쌍벽을 이뤄온 주역이기 때문이다. 국가 단체전인 농심배 본선을 밟아본 세계 유일의 여성 기사라는 수식도 따라다닌다. 그 박지은이 곧 시작될 올 여자바둑리그에 참가 신청서를 내지 않았다. 최고 스타가 최고 무대에 불참하게 된 사연을 듣기 위해 박 9단과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여자 바둑계 ‘레전드’ 박지은 9단. 그는 “승부의 긴장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하겠다”며 내달 시작될 최대 기전 여자바둑리그 불참을 선언했다. /한국기원

-장기 레이스로 치르는 최대 행사에 박 9단이 빠져 많은 팬이 의아해한다.

“일부러 시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약 5년 전부터 바둑 승부에서 한발 멀어지고 싶다고 생각해온 것을 이제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다. 2018년 가을부터 1년간 휴직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승부에서 멀어지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을 텐데.

“한마디로 승부에 대한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성적이 내려가면 만회하려고 몇 배 더 공부했는데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승부사가 결과에 무덤덤해지고 노력 충동도 못 느끼는 상황에 왔다면 승부를 내려놓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열정이 식게 된 결정적 원인은 뭘까? 나이가 들면서 성적이 내려가는 데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나이와 성적의 상관관계는 분명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36세의 원성진 9단이 요즘 최전성기를 누릴 정도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니 결단을 내린 것이다.”

--승부를 내려놓는다는 건 은퇴를 의미하나?

“바둑계를 떠날 것까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1인자를 다투는 최일선 승부(본격 기전)에만 불참하기로 했다. 연령별 제한 기전인 지지옥션배나 대주배, 그리고 페어 대회 등 이벤트성 행사엔 출전할 생각이다.”

-앞으로 어떤 삶을 꿈꾸나.

“바둑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고 싶다. 지난해 11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대국과 보급이 프로 기사의 주 임무인데, 유튜브로 팬들과 소통하는 것도 훌륭한 보급이라고 생각한다. 김명완 8단과 함께 ‘아름바둑’이란 이름의 발달장애인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달라진 일과에 만족하나.

“쌓였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고 홀가분하다. 승부의 긴장에서 벗어나면 이토록 자유로운 세계가 주어진다는 게 신기하다. 일상의 여유도 찾았다.”

-바둑 공부도 하나? 언젠가 승부 최일선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을까.

“최일선 승부 현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그러려면 공부를 재개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TV 등을 통해 타이틀 중계를 보긴 하지만 공부 목적은 아니다.”

-입단 전 ‘연구생 1조 첫 여성’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2002년 제1회 도요타배 때는 당시 일본 명인 요다를 눕혀 양국 바둑계를 뒤집어 놓기도 했다. 24년 프로 생활 중 가장 못 잊는 사건은?

“2008년 원앙부동산배 결승서 루이 9단을 꺾고 우승하면서 한국 첫 여자 9단이 됐을 때 가장 많은 축하를 받은 거로 기억한다.”

-존경하는 프로 기사는?

“서봉수(68) 조치훈(65) 루이(58) 사범님이다. 세 분 모두 평생 변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승부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내가 못 갖춘 부분이어서 많이 부럽다.”

-바둑계 발전 방안이 있다면?

“바둑도 골프처럼 남녀를 분리 운영해 규모를 키울 때라고 본다. 현재는 남자 쪽이 역차별당하는 느낌이 좀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 약하다는 소리만 듣고 있다. 남녀 혼성 대국은 별도 오픈 대회를 한두 개 만들어 소화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