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져도 된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너희들은 이미 한국 축구의 희망을 보여준 거다. 세계가 ‘한국은 안 된다’고 했을 때 10% 이하의 확률을 뚫어내 기적을 만든 게 너네들이다. 꿈은 또 이뤄진다. 믿는다.”

브라질과의 16강전을 앞둔 태극전사에게 역대 브라질을 상대로 한국이 단 한 번 이겼던 그 경기, 결승골을 넣었던 옛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김도훈이 조선닷컴을 통해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한국이 브라질을 상대로 거둔 역대 전적은 7전 1승 6패. 23년 전인 1999년 3월28일 딱 한 번 이겼다. 전광판이 멎은 뒤 추가시간에 들어간 김도훈의 결승골 덕이었다.

김도훈이 추가시간에 최성용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기록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그는 “당시 결승골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최성용이 밀어준 그 공이 끝까지 명료하게 보였다”며 “이길 거라는 생각은 솔직히 안 했다. 당시 브라질은 세계 1위였다. 우리는 도전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선수들끼리 경기 전에 ‘다른 거 하지 말고 우리 축구를 하자. 자신있게 우리만의 경기를 하면 좋은 결과 있을 것’이라고 서로 다독이며 경기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잃을 게 없었다. 진다고 해도 세계 최강과의 경기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며 “그때 그 마음이 후배들에게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도훈은 “이미 선수들은 우리나라에 희망과 도전을 선물한 사람들이다. 선수들과 국민이 한마음으로 또 다른 도전에 나서는 것일 뿐”이라며 “희망을 갖고 하면 세계 1등도 잡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희망을 가지고 후회 없이 경기를 뛰고, 온 국민이 응원하면 기적이 다시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김도훈의 결승골로 한국이 극적으로 승리했던 이 경기는 브라질의 2진급을 상대로 한 경기가 아니었다. 직전 대회인 1998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국이자 당시 피파 랭킹 1위였던 브라질의 최정예 멤버가 대부분 투입됐다.

역대 브라질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호나우두가 부상 여파로 벤치를 지켰지만, 투톱 자르데우와 아모로주가 주는 중압감은 대단했다. 자르데우는 직전 시즌 포르투갈 리그에서 32경기에 출전 36골을 넣은 유럽 최고의 득점 기계였고, 그의 파트너 아모로주는 이태리 리그에서 바티스투타와 비어호프 등 등 당대 최고의 공격수를 제치고 33경기에 출장해 22골을 넣은 득점왕 출신이었다.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준 히바우두와 제 호베르투, ‘프리킥 마법사’ 주니뉴와 플라비우 콘세이상이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양쪽 윙백은 브라질 역사상 최고의 우측 수비수로 꼽히는 카푸와 AC 밀란의 왼쪽 풀백 세르지뉴였다. 당시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던 데니우송과 호베르투 카를로스, 레오나르두, 에메르송, 신예 호나우지뉴는 벤치를 달궜다.

피파 랭킹 36위 한국은 직전 월드컵에서 1무2패로 실망스런 경기력을 보였던 멤버들이 대부분 스타팅 멤버에 포함됐다. 김병지가 골문을 지키고, 홍명보와 이임생, 김태영이 3백을 구성했다. 미드필더는 요즘 보기 드문 6명이었다. 서동원과 노정윤이 중앙에서 볼배급을 맡았고, 하석주와 김도근이 왼쪽을, 신홍기와 유상철이 오른쪽을 맡았다. 최전방엔 황선홍이 섰다.

90분간 정신 없이 두들겨 맞던 한국은 김병지의 활약 덕에 골을 먹지 않았다. 그러던 후반 추가시간이 32초 지난 순간 후반에 교체돼 들어온 우측 윙백 최성용과 스트라이커 김도훈이 사고를 쳤다. 수비 진영에서 2명을 제치고 올라온 미드필드 진영까지 올라온 홍명보가 오버래핑을 하던 최성용에게 패스를 줬고, 최성용은 달려 들어가던 김도훈에게 전진패스를 넣었다. 김도훈은 최성용 패스의 결을 살려 그대로 슛을 쐈다. 공은 브라질 골키퍼 세니를 통과해 골망을 갈랐다.

브라질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던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이날의 수훈갑은 또 있었다. 파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던 골키퍼 김병지였다. 그는 브라질의 폭격을 0실점으로 틀어 막았다. 그도 김도훈처럼 한국 대표팀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김병지는 조선닷컴과의 통화에서 “그때 브라질 멤버도 아주 막강했다. 그런데도 우린 이겼다”며 “Again 1999. 다시 우리가 승리하는 모습 보여주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