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에서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웨일스와 잉글랜드가 30일 오전 4시 카타르월드컵 조별 리그 B조 3차전에서 맞붙는다. 월드컵 사상 첫 ‘영국 더비’다.

올림픽에서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웨일스가 한 팀으로 영국(UK) 유니폼을 입지만 월드컵에는 각자 출전한다. 네 팀 모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봤지만 서로 만나본 적은 없다. 웨일스가 64년 만에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잉글랜드 해리 케인(29·토트넘)과 웨일스 개러스 베일(33·로스엔젤레스FC) 두 주장의 자존심도 걸려 있다. 케인은 발목 부상 회복이 더딘데도 출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웨일스는 지금 영국 땅인 브리튼섬의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이 잉글랜드를 이루는 앵글로색슨족에게 밀려나 남서부에 자리 잡은 나라다. 1200년대 잉글랜드 침략을 받고 연합 왕국에 통합됐다. 스코틀랜드만큼 독립 의지가 크지는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수백 년 동안 척박한 땅에서 경제·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시골 오지로 무시당해왔다는 불만이 크다. 19세기 여행 작가 조지 보로는 “잉글랜드 사람들은 웨일스를 정복했다는 걸 잊었지만, 웨일스가 그걸 잊기까진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썼다. 지금도 인구 20% 정도는 켈트어계인 웨일스어를 쓴다. 최근 웨일스축구협회는 ‘웨일스’라는 이름을 웨일스어인 ‘컴리(Cymru)’로 바꾸기를 추진하고 있다.

웨일스는 럭비를 잘한다. 축구는 종주국인 잉글랜드에 비해 ‘변방’으로 통하지만 굽힐 순 없는 노릇. 장외전도 뜨겁다. 지난 27일(현지 시각) 스페인령 테네리페섬으로 단체 응원 여행을 떠난 웨일스 서포터들이 잉글랜드 응원단과 충돌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월드컵 예선 최종전을 앞둔 지난 6월에는 영국 왕실이 베일에게 대영제국 훈장(MBE)을 내리자 일부 웨일스 팬이 “베일은 더 이상 우리의 레전드가 아니다”라며 반발한 일도 있었다.

전적에서는 잉글랜드가 크게 앞선다. 지금까지 103차례 맞붙어 68승21무14패를 기록 중이다. 카타르에서도 잉글랜드는 1승1무(승점 4)로 조 선두지만 웨일스는 1무1패(승점 1)로 조 4위에 머물러 있다. 웨일스는 16강 자력 진출은 실패했다. 잉글랜드를 큰 점수 차로 꺾고 이란과 미국이 비겨야 희망이 있다. 롭 페이지 웨일스 감독은 “16강 진출 여부는 우리 손을 떠났지만 우리는 승리로 대회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미국과 이란도 벼랑 끝 대결을 펼친다. 핵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끼리 으르렁거리는 두 나라는 하필 16강행 티켓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만났다. 이란에서는 지난 9월 한 여대생이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됐다가 사망한 뒤로 반정부 시위 물결이 거세다. 카타르에서도 정부파와 반정부파가 충돌하는 등 여파가 미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대표팀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이 B조 순위표를 올리면서 이란 공식 국기 중앙에 있는 이슬람 공화국 엠블럼을 지워버리는 일도 있었다. 미국 대표팀 측은 “이란 여성 인권을 지지하는 의미”라고 밝혔다. 이란축구협회가 이를 FIFA 윤리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반발하면서 긴장은 더 팽팽해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16강 진출에 가장 먼저 실패한 개최국 카타르와 30일 0시 A조 조별 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같은 시각 에콰도르(2위·1승1무)와 세네갈(3위·1승1패)도 16강 자리를 두고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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