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홀(파4)에서 웨지로 띄운 세 번째 샷이 그린 위를 한참 굴러 홀로 들어갔다. 16번홀(파4)에서도 30야드를 남기고 친 버디 칩샷이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림(30)은 14일 캘리포니아주 미션힐스 컨트리클럽(파72·6763야드)에서 열린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 투어 ANA 인스피레이션(총상금 310만달러) 최종 라운드를 선두와 2타 차로 출발했다. 칩인으로 버디를 2개 잡은 덕분에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린 상태에서 17번홀(파3)을 맞았다. 하지만 뜻밖에 보기를 하며 한 타를 까먹었고, 선두 넬리 코르다(미국)에게 다시 2타 뒤진 3위가 됐다. 우승과는 멀어진 것 같았다.
이미림은 18번홀(파5) 세컨드 샷을 준비하며 4번 아이언과 5번 우드 사이에서 망설이다 우드를 골랐다. 아일랜드 그린 뒤편엔 병풍처럼 펼쳐진 파란 벽이 서 있었다. 관중석이 놓였던 곳에 들어선 대형 광고판이었다. 투온을 노리고 강하게 샷을 하더라도 이 벽이 막아주기 때문에 공을 물에 빠뜨릴 염려가 없었다. 이미 연습 라운드 때 시도해본 공략법이었다.
홀까지 215야드 남기고 친 샷은 계획대로 벽에 맞고 떨어졌다. 무벌타 드롭. ‘버디만 하자’는 생각으로 다시 웨지를 꺼내 칩샷을 했다. 그런데 20m 가까이 굴러 내려간 공이 깃대에 맞고 홀인됐다. 이미림은 얼떨떨하다는 듯 살짝 웃음을 띠며 하루 세 번 마법을 부린 ‘요술봉’을 내려다봤다.
18번홀 칩인 이글을 포함해 이날 5타를 줄인 이미림은 코르다, 브룩 헨더슨(캐나다)과 최종 합계 15언더파 273타 동타를 이뤘다. 다시 18번홀에서 시작한 연장전에선 파란 벽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이미림은 세컨드 샷으로 그린을 살짝 넘겼고, 칩샷을 홀 1.8m에 붙여 세 명 중 유일하게 버디로 마무리를 했다.
3년여 만의 LPGA 투어 승리였다. 통산 4승이자, 그토록 고대했던 첫 메이저 우승. 2011년부터 10년 연속 한국 선수의 메이저 정상 행진도 이어갔다.
이미림은 연신 눈물을 닦으며 “모르겠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미쳤던 게 분명해요”라고 했다.
이유가 있었다. 공이 너무 안 맞아 골프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기 때문이다. 연장전을 앞두곤 누군가와 다급하게 통화하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김송희(32) 코치였다. ‘세리 키즈’의 대표 주자로 꼽히며 2007년부터 2013년까지 LPGA 투어에서 활약했던 김 코치는 뛰어난 재능을 갖췄으면서도 우승 한 걸음 앞에서 멈추곤 했다. 스포츠심리 전공 석사 학위를 받은 뒤론 후배들을 지도해왔다.
이미림은 지난 3년여간 깊은 슬럼프를 겪었다. 올 시즌 출전한 한국과 미국 세 대회에선 모두 컷 탈락했다. 지난 7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김 코치를 찾아갔다. “손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 억지로 공을 맞히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훈련만 반복했다. 마법 같은 3번의 칩샷은 한 달 반 동안 파3 연습장에서 쇼트게임의 기본을 날마다 훈련한 결과였다. 이번 대회에선 그저 리듬만 찾으려고 했는데, 덜컥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연장전을 앞두고 이미림은 김 코치에게 전화로 “샷이 너무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돌아오라”는 격려가 돌아왔다. 김 코치는 “미림이가 ‘마지막 칩인 이글은 사실 제대로 맞지 않아 홀을 지나칠 줄 알았다’며 울더라”고 했다.
이날 상당수 외신은 “무관중 대회에 불필요한 벽을 설치해 경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며 대회조직위를 비판했다. 하지만 벽을 활용한 선수는 여럿이었다. 헨더슨이 4라운드 18번홀에서 친 공은 벽 아래 틈으로 들어갔지만 무벌타 드롭을 한 뒤 버디를 잡아 연장에 합류했다. 모두에게 공평한 환경이었다.
이미림은 2010년 국내 투어에 데뷔해 3승을 올린 뒤 퀄리파잉스쿨을 거쳐 2014년 미국에 진출했다. 어려운 미국 도전을 기피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무조건 큰 무대에 가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고질적 손목 부상을 지독한 노력으로 극복했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잘 치고도 만족을 못 해 별명이 ‘징징이’. 이미림은 우승 기자회견에서 “오늘 운이 꽤 좋았다”고 했다. 물론 거저 잡은 행운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