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2013년 11월 14일.
제10구단으로 창단한 KT 위즈가 새 유니폼과 마스코트를 공개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 KT 위즈의 여섯 선수가 유니폼 모델로 나섰다.
왼쪽부터 안상빈(이후 안현준으로 개명), 김병희, 박세웅, 류희운, 심재민, 고영표. KT 창단 멤버인 이들 중 롯데 선발 투수로 활약 중인 박세웅을 제외하면 5명이 아직까지 KT 유니폼을 계속 입고 있다.
지난해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친 고영표는 올 시즌 KT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꿰차며 4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실점 이하)를 기록했다. KT가 하위권에 머물 때 주축 투수로 활동하며 ‘암흑기의 에이스’로 불렸지만 그가 사회복무요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KT가 ‘가을 야구’를 하는 강팀이 되며 더는 이제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게 됐다. 지금은 도쿄올림픽 대표팀 승선 가능성이 점쳐지는 국내 정상급 선발이다.
KT 초창기 좌완 불펜으로 나섰던 심재민은 고영표와 비슷한 시기에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한 뒤 올 시즌 돌아왔다. 현재 퓨처스리그에 있다. 투수인 안현준과 류희운도 현재 퓨처스리그에서 공을 던진다.
6명 중 김병희는 유일한 타자다. 그는 프로 경력 초반부터 부상의 불운을 맞았다. 2014시즌을 앞둔 스프링캠프에서 오른쪽 검지가 부러졌는데 이듬해 또 같은 부위가 부러졌다. 재활을 하다가 2015년 10월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했다.
전역 후에도 쉽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김병희는 2019시즌 4경기, 2020시즌 29경기 출전에 그쳤다.
장면 둘.
2021년 4월 25일.
롯데 자이언츠와 수원 홈 경기를 앞두고 만난 이강철 KT 감독은 황재균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황재균은 전날 경기에서 불규칙 바운드에 얼굴을 맞아 코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베테랑 2루수 박경수도 부상으로 빠진 상태. 이 감독은 머릿속이 복잡한 듯 쉽사리 라인업을 확정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선발 라인업 얘기를 하며 스쳐간 이름이 이날 1군으로 올라온 김병희였다. “김병희도 생각하고 있고…” 하지만 이날 선발 라인업엔 일단 김병희가 없었다.
경기는 접전으로 흘러갔다. 8회말 조용호의 대주자로 그라운드를 밟은 김병희는 9회말 5-5로 맞선 2사 만루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그의 1군 통산 안타는 단 4개. KT 팬들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김병희가 롯데 마무리 김원중을 상대로 친 공이 1루수를 살짝 넘겼다. 끝내기 안타였다.
황재균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1군으로 콜업된 그날, 끝내기 안타를 친 김병희는 “이 맛에 야구를 한다”며 “김강 타격코치님이 빠른 공만 노리라고 하셨다. 두 개의 변화구를 참고 자신감이 생겼다. 헛스윙 이후에도 아직 한 개가 남았다고 생각했고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된다. 황재균에게 닥친 불의의 부상이 7년 무명 생활을 한 김병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2020시즌에도 김병희는 5월 한화전에서 황재균이 손가락 부상으로 빠진 상황에서 선발 기회를 얻어 데뷔 첫 홈런을 때려낸 바 있다.
황재균은 이날 인스타그램을 통해 김병희의 롯데전 끝내기 안타를 축하했다. 처음엔 ‘병휘’라고 썼다가 오타라며 웃었다.
장면 셋.
2021년 4월 27일.
이강철 감독은 SSG 랜더스와 벌인 문학 원정 경기에서 김병희를 선발 2루수로 기용했다. 올 시즌 첫 선발 출전에 김병희는 무려 여섯 번이나 타석에 들어섰다.
2회초와 4회초 볼넷을 얻어낸 김병희는 5회초엔 2타점 2루타를 때렸다. 6회초와 8회초에도 볼넷을 얻으며 5출루 경기를 했다. KT는 타선이 폭발하며 SSG를 14대5로 대파했다. 겨우 두 경기이긴 하지만 김병희의 타율은 0.667, 출루율은 0.857에 달했다.
김병희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매 순간 집중하고 단순하게 플레이하려고 했다. 지난 롯데전처럼 긴장은 하지 않았다”며 “타석에 나가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잘 이루어져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1군 첫 게임에서 좋은 결과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좋은 기운이 이어지는 것 같다. 야구를 하면서 처음으로 하루에 다섯 번이나 출루했다. 앞으로도 모든 경기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전했다.
시즌 자신의 첫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고 두 번째 경기에서 5출루를 한 선수는 아마 KBO리그 역사에서 김병희가 유일하지 않을까.
장면 넷.
2021년 4월 28일.
SSG와 경기를 앞두고 이강철 감독은 김병희에 대해 “콜업할 때부터 지금처럼 해주길 바랐다”며 “1군 경험도 있고, 2군에서도 괜찮았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카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병희가 1군 무대에 데뷔한 것은 이강철 감독이 KT 지휘봉을 잡은 첫 시즌인 2019년이다. 이 감독은 “2년 전보다는 얼굴이 밝더라”며 “나이를 먹고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마음을 내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날도 김병희는 주전 2루수로 나섰다. 지난 두 경기에서 워낙 맹활약을 펼친 터라 타율과 출루율이 더는 오르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병희는 긴 무명의 터널을 확실히 벗어나고 싶은 듯 이날도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0-0으로 맞선 2회초 2사 1루 상황에서 김병희는 SSG 선발 오원석의 140km짜리 직구를 때려 좌중간 담장을 넘겼다. 팀에 2-0 리드를 안긴 투런 홈런이었다. 그의 통산 2호 아치이자 올 시즌 마수걸이포였다.
김병희는 4회초엔 내야 안타를 만들며 2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7회초에는 선두 타자로 나와 볼넷을 얻어내며 100% 출루를 이어갔다.
하지만 너무나 영화 같은 김병희의 스토리는 이날 승리로까진 이어지지 못했다. SSG는 7회에 로맥과 한유섬이 2타점씩을 기록하며 역전에 성공했다. KT는 더는 따라붙지 못하고 2대4로 패했다. 김병희는 마지막 타석에선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그래도 꿈 같은 사흘이었다. 김병희는 올 시즌 타율 0.667에 출루율 0.818, OPS는 2.151을 기록 중이다.
김병희의 진정한 생존 경쟁은 이제부터다. 그는 어떤 숫자로 이번 시즌을 마치게 될까. 오랜 무명 생활을 버틴 KT 창단 멤버의 마법 같은 활약에 ‘마법사 군단’ 위즈 팬들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