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창모와 소형준은 도쿄올림픽 한일전에 선발로 나올 후보로 꼽힌다. / 조선일보DB

한국 야구 대표팀의 명장면은 한일전에서 많이 나왔다. ‘국민 타자’ 이승엽은 ‘한일전의 사나이’라 부를 만하다. 이승엽은 2000 시드니올림픽 3~4위전에서 0-0으로 맞선 8회말 2사 2·3루,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타점 2루타를 때려냈다. 한국은 3대1로 승리하며 값진 동메달을 따냈다.

이승엽은 2006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1라운드 한일전에서도 영웅이 됐다. 1-2로 뒤진 8회 구원 이시이 히로토시의 몸쪽 변화구를 끌어당겨 120m짜리 우월 투런 홈런을 만들어 냈다. 한국의 3대2 승리.

미국에서 열린 2라운드에서도 한국은 0-0으로 맞선 8회 2·3루에서 이종범이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2타점 적시타를 쳐서 짜릿한 2대1 승리를 거뒀다. 1라운드에 이어 2라운드에서도 일본을 꺾으며 기세를 올린 한국은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일본에 0대6으로 패했다. 다소 이상한 대회 운영 방식으로 한국은 1패만 하고도 3패의 일본에 우승컵을 내줬다.

다음은 그 유명한 2008 베이징올림픽. 예선에서 일본을 5대3으로 물리친 한국은 준결승에서 숙적 일본을 다시 만났다. 예선 7경기에서 22타수 3안타로 극심한 부진을 겪던 이승엽은 2-2로 맞선 8회말 1사 1루에서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우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포를 터뜨렸다. 한국의 6대2 승. 경기 후 눈물을 쏟는 이승엽의 모습이 아직도 팬들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한국은 결승에서 쿠바를 꺾고 9전 전승으로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의 감격을 누렸다.

2009 WBC도 한일전의 묘미를 만끽한 대회였다. 1라운드 첫 대결에서 2대14로 충격패를 당한 한국은 조 1·2위 결정전에서 김태균의 결승타로 1대0으로 승리했다. 다르빗슈 유를 상대한 2라운드에서는 이진영의 2타점 적시타 등에 힘입어 4대1로 이겼다. 결승에선 추신수의 2점 홈런 등으로 맞섰지만 연장 승부 끝에 3대5로 아깝게 패했다.

‘도쿄대첩’이라 불리는 2015 WBSC 프리미어12 준결승도 잊을 수 없다. 오타니 쇼헤이의 구위에 눌려 8회까지 0-3으로 끌려간 한국은 9회 오재원·손아섭·정근우의 연속 안타로 1점을 뽑아냈다. 이어 이용규가 몸에 맞는 공, 김현수가 볼넷을 얻으며 2-3까지 추격했다.

다음 타자는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무사 만루에서 4구째 날아든 포크볼을 받아쳐 역전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내 승부를 4대3으로 뒤집었다. 9회말을 잘 막아내며 승리를 지킨 한국은 결승에선 미국을 8대0으로 대파하고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2008 베이징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역투한 김광현. /조선일보DB

◇ 한일전을 빛낸 투수들

명장면을 기억하다 보면 아무래도 우리가 점수를 내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명승부를 뒷받침했던 건 투수진의 눈부신 호투였다. 주요 대회 한일전 승리 당시 투수 기록을 살펴본다.

♦ 2000 시드니올림픽 3~4위전 3대1 승

구대성이 155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1실점만 하며 완투승을 거뒀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역투. 참고로 상대 선발 마쓰자카는 160개의 공을 던지고 완투패를 당했다.

♦ 2006 WBC 1라운드 3대2 승

김선우와 봉중근, 배영수, 구대성, 박찬호가 이어 던지며 2실점으로 틀어막았다. 7회 등판한 구대성이 2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 박찬호가 9회를 무실점으로 막으며 세이브를 올렸다.

♦ 2006 WBC 2라운드 2대1 승

선발 박찬호가 5이닝 무실점으로 던졌고, 세 번째 투수 김병현이 승리 투수가 됐다. 9회 구대성이 선두타자에게 홈런을 맞고 흔들리자 오승환이 올라와 불을 끄며 세이브를 거뒀다.

♦ 2008 베이징올림픽 준결승 6대2 승

스무 살의 선발 김광현이 8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다. 9회에 나온 윤석민이 3자 범퇴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류현진·김광현이 한국 야구의 중심으로 떠오른 대회다.

2009 WBC 한일전에서 맹활약한 봉중근. /조선일보DB

♦ 2009 WBC 1라운드 조 1·2위 결정전 1대0 승

‘봉열사’ 봉중근이 세 번 만난 이치로를 모두 아웃 처리하는 등 5.1이닝 무실점의 빼어난 피칭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정현욱과 임창용으로 이어진 계투진의 활약도 만점.

2009 WBC 2라운드 승자결승 4대1 승

이번에도 봉중근이 맹활약했다. 5.1이닝 1실점으로 잘 던지고 내려왔고 뒤이어 윤석민·김광현·임창용이 나와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 2015 프리미어12 준결승 4대3 승

선발 이대은은 3.1이닝 3실점으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한국은 이어 6명의 투수(차우찬·심창민·정우람·임창민·정대현·이현승)를 등판시키는 ‘벌떼 작전’으로 더는 점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 류·김·양을 쓸 수 없는 올림픽

가장 최근 일본과 맞붙었던 주요 대회라면 2019 프리미어12를 들 수 있다. 한국은 일본에 두 번 패했는데 모두 투수진의 활약이 아쉬웠다.

한국은 슈퍼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에 8대10으로 패했다. 선발 이승호가 2이닝 6실점으로 무너지며 조기 강판된 것이 뼈아팠다. 결승에선 제구력이 흔들린 선발 양현종이 3이닝 4실점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3대5로 패했다.

눈앞으로 다가온 도쿄올림픽은 어떨까. 코로나 사태로 1년 뒤로 밀린 도쿄올림픽은 여전히 개최가 불투명하다. 작년 12월 일본 NHK 설문 조사에서 32%의 일본인이 ‘도쿄올림픽을 취소해야 한다’, 31%가 ‘재연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이런 여론과는 달리 대회가 실제로 무산될 가능성은 작다는 게 중론이다. 정치·경제적으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관중을 들이지 않더라도 올림픽을 강행할 가능성이 크다.

도쿄올림픽이 예정대로 열려 야구 한일전이 펼쳐진다면 한국은 누가 선발로 나서야 할까.

류현진과 김광현 등 메이저리거는 현실적으로 올림픽에 나설 수 없다. 올 시즌을 앞두고 양현종까지 미국 무대에 진출하면서 중량감 있는 국내 선발 투수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2020시즌 평균자책점 상위 15명 중 12명이 외국인 투수일 정도로 최근 KBO리그에선 토종 선발이 귀하다.

일단은 올 시즌을 지켜봐야 한다. 상황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전으로만 시계를 돌려본다고 해도 당시엔 이영하(24·두산)와 최원태(24·키움)가 도쿄올림픽에 나설 ‘영건’으로 주목받았다. 이영하는 2019시즌 17승4패, 평균자책점 3.64로 국내 최정상급 선발로 올라섰고, 최원태도 11승5패, 3.38의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2020시즌 두 선수는 나란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영하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5승11패6세이브, 4.64로 아쉬움을 남겼다. 최원태도 부상 등에 시달리며 7승6패, 5.07에 그쳤다. 그리고 올림픽은 1년 뒤로 연기됐다.

◇ 엔구행이 한구행으로?

올 시즌 전반기엔 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모른다. 그래도 작년 시즌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한국 대표팀 선발진의 주축을 이룰 선수가 몇 명 눈에 띈다.

구창모(24·NC)는 유력한 한일전 선발 후보다. 작년 전반기에만 9승을 올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구창모는 구대성·봉중근·류현진·김광현 등 그동안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특급 좌완 계보를 이을 수 있는 선수다.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찌르는 특유의 칼날 제구를 선보인다면 정교한 일본 타자들을 공략할 수 있다.

하지만 몸 상태가 변수다. 구창모는 지난해 왼팔 전완부 피로골절로 후반기를 거의 날렸다. 골밀도가 부족하다는 진단을 받은 그는 올 시즌 천천히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스프링캠프 합류도 3월말로 늦췄다. 과연 ‘엔구행(엔씨 팬은 구창모 덕분에 행복해)’이 올여름 ‘한구행(한국 팬은 구창모 덕분에 행복해)’로 바뀔 수 있을 지 관심이다.

작년 신인왕 소형준(20·KT)의 성장도 지켜봐야 한다. 베이징올림픽 당시 프로 2년차였던 스무 살 김광현이 일본을 상대로 호투한 것을 생각하면 소형준도 도쿄올림픽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선동열 전 대표팀 감독이 “스무 살이 아닌 베테랑이 던지는 것 같다”고 극찬할 정도로 큰 심장을 가진 만큼 올림픽이란 큰 무대에서의 활약을 기대하게 한다.

2020 한국시리즈가 낳은 ‘깜짝 스타’ 송명기(21·NC)도 전반기 한 단계 더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면 도쿄행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국내 투수 중 가장 평균자책점이 낮았던 삼성 최채흥(26), 안정적인 기량을 보여준 SK 문승원(32) 등도 일본을 상대로 선발 등판할 수 있는 후보들이다. 한국 야구계는 지난해 구창모처럼 올 시즌 실력이 급성장한 선발 투수가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나카와 스가노는 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의 원투 펀치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 조선일보DB

◇ 다나카가 돌아왔다

하지만 역시 일본과 비교하면 선발의 무게감이 크게 떨어진다. 일본엔 일단 고국 무대로 복귀한 다나카 마사히로(33)가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7시즌을 뛰며 78승46패, 평균자책점 3.74의 뛰어난 기록을 남긴 다나카는 올 시즌을 앞두고 친정팀인 라쿠텐과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액인 연봉 9억엔에 2년 계약을 맺으며 고국 무대로 돌아왔다.

다나카는 도쿄올림픽에 나가 조국에 금메달을 선사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는 복귀 기자회견에서 “올해는 동일본대지진 10주년이 되는 해로, 개인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해다. 반드시 금메달로 팬들께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올림픽을 통해 지진 피해를 크게 입었던 동일본 지역의 재건을 홍보하려고 한다. 그래서 야구 개막전도 후쿠시마에서 열린다. 센다이가 연고지인 라쿠텐 골든이글스는 당시 동일본대지진으로 구장 시설이 파괴되는 등 큰 시련을 겪었다.

올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렸던 스가노 도모유키(32)도 연봉 8억엔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남았다. 스가노는 지난 시즌 개막전부터 13연승을 질주하는 등 14승 2패 평균자책점 1.97의 눈부신 성적을 거두고 빅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하지만 포스팅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에서 만족스러운 제안을 받지 못하자 요미우리 잔류를 택했다.

스가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101승49패, 평균자책점 2.32의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이 상대하기엔 부담스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다.

역시나 미국행을 고려했던 센가 고다이(28)는 소프트뱅크 구단이 포스팅 불허 방침을 내리며 올해도 일본에서 뛴다. 재팬시리즈 우승 반지만 5개인 센가는 통산 55승29패, 평균자책점 2.78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으로선 그나마 프리미어12에서 우리에게 공포감을 선사했던 오타니 쇼헤이(27·LA 에인절스)가 미국에 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