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전북 새만금에 9조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인공지능(AI)과 수소, 로봇 산업이 하나로 맞물리는 거대한 미래 첨단 산업 거점을 조성하는 것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출범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단일 기업 투자다. 이는 단순한 제조 공장 설립을 넘어 생산과 에너지 수급, 도시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테스트베드’가 새만금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정관계 200명 참석한 협약식… “국가 차원 실증 거점 공인”
전북도는 지난달 27일 군산 새만금컨벤션센터(GSCO)에서 투자협약(MOU)을 체결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관영 전북지사,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직접 참석했으며, 국토교통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부, 기후에너지환경부 등 핵심 중앙 부처 장관들이 대거 참석했다. 새만금개발청장 등 정관계 인사 200여 명이 자리를 채웠다.
정부 5개 부처와 광역 지자체, 민간 기업이 단일 투자 건에 공동 서명하는 전례를 찾기 힘든 광경에, 새만금이 국가 차원의 미래 산업 실증 거점으로 공식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번 투자는 단기간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5월 새만금개발청과 미래 모빌리티 기술 도입 및 AI 스마트시티 구축 업무 협약을 맺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수소 세션을 통해 새만금과의 접점을 늘려왔다.
전북도 역시 기민하게 움직였다. 지난해 11월 대기업들의 투자 발표가 이어지자, 현대차의 방향성이 새만금의 재생에너지 인프라와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수개월에 걸친 치밀한 물밑 협상 끝에 9조원대 투자를 이끌어냈다.
◇5대 핵심 사업 동시 추진
현대차그룹의 투자는 5개 핵심 사업으로 나뉘며, 이는 단순한 개별 사업의 나열이 아니라 첨단 산업의 밸류체인을 통째로 새만금에 이식하는 구조다. 직·간접 경제 유발 효과는 16조원으로 추산되며, 고용 창출 규모만 7만1000명에 달한다.
가장 큰 자금이 투입되는 곳은 AI 데이터센터다. 투자액만 5조8000억원이다. 2027년 착공해 2029년 완공하는 것이 목표다. 이곳에는 고성능 연산 장치인 그래픽 처리 장치(GPU) 5만장이 들어서며,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개발과 스마트 공장 구현에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한다. 전력 소모가 극심한 데이터센터의 단점은 새만금의 재생에너지로 상쇄한다. 현지에서 전력을 직접 수급해 전력 비용을 낮추고 탄소중립을 실현한다는 계획이다.
데이터센터와 수소 생산을 뒷받침할 재생에너지 발전 단지에는 1조3000억원을 투자한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2021년부터 새만금 육상태양광 1구역에서 99메가와트(㎿)급 발전 시설을 가동하고 있으며, 이를 2035년까지 기가와트(GW)급으로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친환경 수소를 생산하는 수전해 플랜트 건립에는 1조원이 배정됐다. 물을 전기로 분해해 수소를 얻는 설비로, 200MW 규모로 시작해 연간 3만t의 그린수소를 생산한다. 외부에서 수소를 들여오지 않고 새만금 내부에서 직접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른바 ‘지산지소(地産地消·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하는)형’ 에너지 자립 구조다. 이 설비 역시 향후 1GW 규모로 확대할 예정이다.
로봇 제조 분야에는 4000억원을 투입한다. 무인 운반차(AGV)와 자율 이동 로봇(AMR) 등 물류 및 배송용 로봇을 연간 최대 3만대씩 양산하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 로봇 전문 생산 기지다. 공장이 가동되면 부품 및 협력 업체의 연쇄 입주가 이뤄질 전망이다.
새만금 스마트 수변 도시(6.6㎢)에는 4000억원을 들여 수소·AI 시범 도시를 조성한다. 현실 세계의 데이터를 다루는 피지컬 AI와 로봇, 수소 에너지가 융합되어 전국 최초의 미래형 무공해 도시 표준 모델이 될 예정이다.
◇전북도, 현대차 투자지원 TF팀 가동
전북특별자치도가 현대자동차의 초대형 투자에 맞춰 행정 역량을 총동원하며 본격적인 속도전에 돌입했다. 도는 지난 4일부터 ‘공무원 전담 책임제’를 전면 가동한 데 이어, 지난 20일에는 ‘현대차 투자 지원 전담팀(TF)’을 신설했다.
이번에 신설된 전담팀은 부서별로 분산된 과제 전담 팀장들과 유기적으로 협업하며 종합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주간 회의를 정례화해 부서 간 쟁점을 즉각 조정하는 한편, 국무조정실 ‘새만금 전북 대혁신 TF’와 긴밀히 소통하며 AI·수소·로봇·재생에너지 등 핵심 산업의 기획과 입지, 인력 양성 및 연구·개발(R&D) 등을 중점적으로 담당할 계획이다.
현대차 측과의 실시간 소통을 위한 ‘핫라인’도 구축됐다. 전력, 용수, 부지, 교통 등 복잡한 기반 시설 관련 민원을 일괄 처리하는 ‘원스톱(One-stop) 지원 체계’를 가동해 기업의 편의를 극대화했다. 각 부서 팀장은 인허가 절차와 인프라 지원 상황을 매일 점검한다. 지난 10일에는 도 관계자들이 현대차 본사를 직접 방문해 전담 조직 운영 현황과 향후 일정을 조율했다.
행정 지원을 뒷받침할 규제도 손질에 나섰다. 전북도는 지난 2월 특례 조문 18개를 발의한 데 이어, 지난 5일에는 전북특별법 개정안에 23개를 추가 발의해 총 41개의 특례를 확보했다. 로봇 실증 특구 지정, 피지컬 AI 산업 육성, 수소 생산 촉진 지역 지정, 재생에너지 직접 전력 거래, 데이터센터 집적 단지 조성 지원 등이 핵심이다. 도는 4월 중 추가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공장 가동의 필수 요소인 공업용수 문제도 해법을 마련했다. 현재 군산정수장과 석성정수장을 통해 하루 30만t의 공업용수 공급이 가능하며, 이 중 18만t의 여유량이 있다. 전북도는 타운홀 미팅을 통해 용담댐(일 30만t)과 금강하굿둑(일 30만t)을 추가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하루 60만t 이상의 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검토를 마쳤다.
◇범정부 TF 출범… “3배 빠른 속도로 인허가 마칠 것”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국무조정실 주도로 ‘새만금·전북 대혁신 TF’가 꾸려져 지난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직접 주재한 이 자리에는 교육부, 행정안전부 등 관계 부처 차관 5명이 배석했으며, 새만금개발청장과 전북도 관계자, 장재훈 현대차 부회장도 함께 자리했다.
이 자리에서 김 총리는 신속한 행정 처리를 강조했다. 김 총리는 “현대차의 이번 투자는 첨단 산업 주도 성장과 지방 주도 성장이 만나는 첫 번째 구체적 출발점”이라고 규정하며, “기존 관행보다 3배 빠른 속도로 행정 절차를 검토해 5월까지 종합 지원 계획을 마련하라”고 부처에 주문했다.
정부는 TF 논의를 거쳐 규제 개선과 세제 혜택, 제도적 인센티브를 총망라한 ‘새만금·전북 대혁신 종합 지원 계획’을 올해 상반기 안에 확정해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인재 육성 체계 구축… 미래 산업 거점 도약
전북도는 정부의 종합 계획에 발맞춰 추가적인 혜택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투자 보조금 지원 규모를 늘리고 기회발전특구 추가 지정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으며, 기업이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RE100 산단 조성, 분산 에너지 특화 지역 지정, 5극 3특 성장 엔진 선정 등도 주요 협의 대상이다.
인력 공급 대책도 체계적으로 마련했다. 훌륭한 인프라가 구축되어도 전문 인력이 부족하면 그 효과를 온전히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북도는 2029년 데이터센터 가동 시점에 맞춰 단계별 인력 양성 체계를 구축한다.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SW 미래 채움’ 사업을 시작으로, 대학과 대학원은 ‘SW 중심 대학’, ‘AI 부트캠프’, ‘AX 대학원’을 만들 예정이다. .
전북도는 이번 9조원 투자를 지역 산업 구조 개편의 신호탄으로 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고, 로봇 제조 클러스터가 지역 제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전망이다. 여기에 수전해 플랜트와 태양광 발전이 에너지를 공급하면 새만금은 자생력을 갖춘 미래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미 현대차 협력사를 비롯한 관련 기업들의 후속 투자 문의가 전북도에 줄을 잇고 있다.
전북도 관계자는 24일 “현대차의 새만금 투자가 조속히 현실화할 수 있도록 전담 조직을 중심으로 밀착 지원하겠다”며 “기업의 투자 구체화 단계부터 인허가, 기반 시설 조성, 제도 개선까지 빈틈없이 챙길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부 TF와 긴밀하게 공조해 새만금과 전북이 대한민국 미래 첨단 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도약하도록 모든 도정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