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미 정권 동시 교체와 함께 불어닥친 관세 폭탄과 잇단 기업 관련 입법은 국내 산업계를 극심한 불확실성 속에 밀어 넣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다. 미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 관세를 위법이라 판결하며 한숨 돌리는 듯했지만, 곧바로 무역법 122조를 동원한 15% 보편 관세 카드가 날아들었다. 노사 관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노란봉투법과, 기업 지배 구조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개정 상법도 올해 잇따라 시행된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 속에서 국내 주요 기업들은 변화에 신속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로 개편하는 동시에 인공지능(AI) 대응을 ‘최우선 과제’로 앞세우고 있다. 과거 AI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따져보는 ‘탐색기’였다면, 지금은 AI가 없으면 아예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실전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단순한 AI 도입을 넘어, 기업의 DNA 자체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시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해 미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AI 주도권 위해 대규모 투자
삼성전자는 AI를 스마트폰·가전·반도체 전 제품군에 적용하는 동시에, 전사 업무의 90%에 AI를 적용하는 ‘AI 드리븐 컴퍼니’ 전환을 선언했다. AI를 활용해 비즈니스의 근본부터 혁신해 삼성전자를 ‘AI를 가장 잘 활용하는 회사’, ‘AI로 일하고 성장하는 회사’로 전환하는 게 목표다. 삼성은 그룹 전반에 AI를 적용하는 동시에 반도체, 바이오 등 핵심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30년까지 총 450조원을 투자한다.
SK그룹은 반도체·에너지·통신을 아우르는 사업 포트폴리오 전반에서 AI를 성장 동력으로 삼고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2028년까지 약 128조원을 투자한다.
현대차그룹은 본업인 자동차 산업 제조 현장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AI 로보틱스’를 미래 경영의 핵심 축으로 내세웠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등 피지컬 AI와 수소 인프라 생태계를 통해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2030년까지 약 125조원을 투자한다.
LG그룹 역시 AI를 가전·배터리·디스플레이 등 주력 사업에 접목하는 동시에 연구·개발(R&D)과 사무 영역까지 확장하며 ‘일하는 방식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그룹 싱크탱크인 AI연구원을 중심으로 기술을 고도화하고 연구·개발을 확대한다. 2030년까지 약 100조원 투자를 예고했다.
◇발전소·제철소도 AI 전환에 미래 투자
이 같은 변화는 IT 대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롯데그룹은 유통·화학·물류 전반에서 AI를 활용한 운영 효율화와 수요 예측 고도화에 나서고 있다. CJ그룹도 AI와 디지털 전환(DT) 경쟁력을 강화해 계열사 간 시너지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CJ그룹은 올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6’에도 지주사 AI실과 DT추진실, CJ올리브네트웍스 등 핵심 조직을 대거 파견했다.
포스코그룹은 제철소를 ‘인텔리전트 팩토리’로 전환하고 있다. 생산, 판매, 마케팅 등 전 분야에서 AI, 로봇과 협업을 강화하는 최첨단 공장이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미국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를 비롯한 조선·방산 분야에서 탄탄한 성과를 거뒀다. 올해는 북미, 유럽 등지에 방산 생산 기지를 잇따라 설립하며, ‘K-방산’ 수출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GS그룹은 현장 직원이 직접 개발한 AI를 외부에도 무료 개방하는 방식으로 산업 생태계와 공유를 이어가고 있다. AI 전환을 ‘동반 성장 전략’으로 확장한 것이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과의 통합 항공사 출범을 앞두고 항공사의 서비스와 신뢰도가 직결되는 안전, 정비 영역에서 AI 활용을 확대하고 있다. 동국씨엠은 AI를 통해 강판 표면의 결함을 검출하는 기술을 개발해, 불균일한 표면과 2만여 종 이상 색상이 혼재된 강판에서도 결함을 찾아낼 수 있다.
정부는 AI 중심의 산업 혁신이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돼선 안 되고, 중소기업 생태계 전반으로 퍼져 이들의 체질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작년 10월 발표한 ‘AI 기반 스마트 제조혁신 3.0 전략’에서도, 제조 현장의 AI 도입률이 아직 대기업 대비 낮은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정부 측은 “2030년까지 스마트공장, AI 공정 도입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전문 AI 기업을 육성해 생태계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