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말레이시아 니파(Nipah) 마을의 돼지 농장에서 정체불명의 환자가 보고됐다. 원인은 과일박쥐에서 유래해 돼지, 말 등 가축으로 전파된 바이러스였다. 이후 이 병원체는 그 지명을 따 ‘니파바이러스(Nipah virus)’로 불리게 됐다. 인근 국가인 싱가포르, 필리핀 등으로 확산된 이후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는 매년 소규모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사람과 동물 모두 감염될 수 있어
니파바이러스는 사람과 동물 모두 감염될 수 있고, 인체 감염될 경우 치명률이 40~75%에 달할 정도로 매우 높다. 2018년 인도 케랄라 지역에서는 환자를 돌보던 가족과 의료진이 연쇄 감염돼 23명 중 21명이 숨지기도 했다. 문제는 현재까지 백신이나 치료제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니파바이러스는 △과일박쥐의 배설물로 오염된 식품을 섭취 △감염된 돼지나 말 등 가축을 접촉 △감염된 환자 체액 등을 통해 전파될 수 있어 방역 당국은 ‘잠재적 팬데믹 병원체’로 분류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해 6월 니파바이러스를 에볼라·지카·라싸바이러스 등과 함께 인류 보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우선순위 병원체 목록으로 지정했다. 언제든 다음 팬데믹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인도·방글라데시에서 환자 발생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니파바이러스 감염 환자 발생이 보고된 바 없다. 그럼에도 질병관리청은 최근 니파바이러스감염증을 ‘감염병예방법’상 제1급 법정 감염병으로 선제 지정했다. 해외에서 유행하지만 갑작스러운 국내 유입을 대비하는 것으로, 2020년 감염병 급수 체계 도입 이후 제1급 감염병으로서는 처음 지정되는 사례다.
1급 감염병은 치명률이 높거나 대규모 확산 우려가 큰 질환으로 △발생 즉시 신고 △음압격리 치료 △검역관리지역 지정 등의 강력한 조치가 뒤따른다. 질병관리청은 최근 환자 발생이 보고된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검역관리지역으로 지정했고, 이 지역을 체류·경유한 사람은 입국 시 발열, 두통 등 증상이 있을 경우 큐코드(Q-CODE, 검역정보 사전입력 시스템) 또는 건강상태질문서를 통해 건강 상태를 검역관에게 신고해야 한다.
여상구 질병관리청 신종감염병대응과장은 “니파바이러스의 1급 감염병 지정은 발생 후 뒤쫓는 대응이 아니라, 치명률과 전파력이 높은 새로운 감염병이 유입되기 전부터 국가가 집중 감시해 사전에 위험을 차단하겠다는 전략적 전환 조치”라며 “다양한 감염병의 국내외 발생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국가 감염병 관리체계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다.
◇사스·메르스·코로나19를 넘어… 방역 시스템 진화
우리나라는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에 이어 코로나19를 지나오며 팬데믹이 초래하는 위협과 피해를 실감했다. 그렇지만 이 경험을 통해 국가 방역 체계도 진화했다.
질병관리청은 2023년 ‘신종감염병 대유행 대비 중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신·변종 감염병 예방·조기 감지·차단을 위한 세부 과제를 시행 중이다. 매년 ‘신종 인플루엔자 모의 훈련’을 통해 검체 채취, 환자 관리, 접촉자 추적을 실제처럼 훈련하고 있으며, 공항·항만 대응을 위해 검역소와 함께 신종 바이러스 해외 유입 및 지역사회 확산 차단 훈련도 반복하고 있다.
진단 체계도 정비됐다. 니파바이러스의 경우 고위험 병원체로 일반 병원에서는 검사할 수 없다. 국내에서는 질병관리청 생물안전 4등급(BL4) 시설에서만 진단 검사가 가능한데 질병관리청은 이미 진단 검사법을 확립했고 의심 환자 발생 시 검체를 안전하게 이송해 신속하게 검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다.
미지의 신종 감염병 유행에 대비해 비축 자원도 확대 중이다. 코로나19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 보호구, 중환자 치료 의료 장비, 항바이러스제 비축, 신규 개발 의약품 도입 등 국가 비축물자 체계를 상시 점검하고 있다.
또 지난해 10월, 질병관리청은 WHO로부터 ‘팬데믹 대비·대응 협력센터’로 지정돼 감염병 대유행 억제 국제 공조의 선도적 역할을 맡게 됐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한국이 축적한 경험과 전문성을 국제사회가 인정한 결과다.
◇새로운 팬데믹 막는 예방 수칙 중요
전문가들은 니파바이러스가 국내에서 아직 환자 발생이 없고, 주로 과일박쥐 등 서식지 주변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파되고 있어 국내 유행의 위험 정도는 낮은 편이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유행을 대비해 해외 유입 감시와 대비는 계속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세대세브란스병원 감염내과 염준섭 교수는 “지구온난화와 도시화로 인한 생태계 변화, 국제 교류 확대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새로운 감염병 발생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으며, 니파바이러스, 조류인플루엔자바이러스(H5N1)와 같이 동물에서 사람으로 종간 전이(spillover)를 일으켜 사람에게 치명적인 증상을 유발하는 병원체의 종류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현재 국내에서 니파바이러스 예방 수칙은 다음과 같다.
니파바이러스 발생 지역을 여행하는 경우 △과일박쥐나 아픈 돼지 등 동물과의 접촉 피하기 △생 대추야자수액 등 음료나 바닥에 떨어진 과일 섭취 금지 △환자의 혈액·체액 직접 접촉 피하기 △비누와 물로 30초 이상 손 씻기이다.
질병관리청은 일선 의료기관에도 “니파바이러스 발생 국가 여행력과 동물 접촉력이 확인되면서 의식 저하, 신경계 증상이 동반되는 환자가 내원할 경우 즉시 질병관리청 콜센터(1339) 또는 보건소로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