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미국 홀랜드아메리카 선사의 초호화 크루즈 ‘웨스테르담호’가 속초항에 처음 입항하는 모습.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든 설악산과 도심을 배경으로 8만 2000t급 선박이 장엄하게 속초항에 닻을 내렸다. 이 선박은 2023년과 2024년에 이어 올해 10월에도 입항할 예정이다. /속초시 제공

강원도 속초시는 설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동해의 푸른 바다와 청초호·영랑호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여기에 실향민의 삶과 문화가 깊이 배어 있는 독특한 정서까지 더해지며 속초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역사와 감성이 공존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매력을 토대로 속초시는 최근 대한민국 크루즈 관광의 새로운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청정 자연과 풍부한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속초만의 경쟁력이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지역 관광 산업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해양수산부는 최근 열린 ’2025년 크루즈 관광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에서 속초를 포함한 인천, 부산, 제주, 여수, 포항, 서산을 ‘7대 국제 크루즈 기항지’로 선정했다. 정부는 이 자리에서 속초를 “분단의 흔적과 어촌 마을, 세계적 명산 트레킹의 도시”라 소개했다. 짧지만 강렬한 문장에는 속초의 정체성과 크루즈 기항지로서의 잠재력이 응축돼 있다.

속초를 찾은 크루즈 관광객들이 아바이마을 포토존을 찾아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속초는 실향의 아픔을 품은 도시다. 청호동 아바이마을에는 6·25전쟁 당시 함경도에서 피란 온 실향민들의 삶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바이마을은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안고 정착한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다. 무동력 배인 갯배를 타고 마을로 들어서면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집들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 좁은 땅에 많은 피란민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며 벽을 맞대고 지은 집들의 풍경이다. 마을 곳곳에는 ‘흥남’ ‘함흥’ 등 북녘 지명을 내건 음식점들도 눈에 띄며 이산의 아픔과 세월의 흔적을 생생히 전한다.

속초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어업의 도시이기도 하다. 항구에는 지금도 어선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속초관광수산시장에는 싱싱한 수산물과 사람 냄새가 가득하다. 이러한 전통의 결 위에 속초는 관광 도시로서의 현재를 쌓았고, 이제는 크루즈 산업이라는 미래로 발걸음을 넓혀가고 있다.

6성급 초호화 크루즈로 불리는 월드 크루즈 ‘시닉 이클립스 Ⅱ’호가 지난 5월 속초항에 처음 입항했다. 이번 입항은 속초항 크루즈 산업의 고급화 및 노선 다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속초의 도시 구조 역시 크루즈 산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자산이다. ‘콤팩트 시티’를 지향하는 속초는 면적이 105㎢에 불과하지만 주요 관광지가 도심에 밀집해 있어 크루즈 관광객들이 제한된 시간 안에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실제 속초항 국제 크루즈터미널에서 아바이마을까지는 도보로 7분, 속초해수욕장과 청초호, 척산온천, 설악산 입구까지는 차량으로 9분 이내에 도달 가능하다.

권금선 속초시 도시개발과장은 “이른바 ‘9분의 기적’이라 불리는 도시 구조는 속초가 가진 가장 결정적인 경쟁력”이라며 “트램 조성 등 도시 재개발을 통해 크루즈 기항지로서의 효율성을 더욱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속초의 크루즈 산업 경쟁력은 수치로도 입증되고 있다. 지난 2023년 코로나로 중단됐던 항로가 재개되자 크루즈 6척이 속초항에 입항했고, 이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 1만1399명이 속초를 찾았다. 지난해에도 4척이 입항했으며, 올해는 상반기에만 벌써 4척이 닻을 내렸다. 하반기에도 2척이 더 입항할 예정이다.

크루즈 입항이 가져오는 경제적 파급 효과도 주목할 만하다. 강원도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6척의 크루즈 입항으로 약 21억원 규모의 직접 소비 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크루즈 한 척이 들어올 때마다 수천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만큼 지역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을 찾은 크루즈 관광객들이 관광을 즐기는 모습.

속초시는 고부가가치 관광 산업인 크루즈 산업을 미래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크루즈 관광의 일회성 소비를 넘어 도시 전반에 체류형 관광을 확산시키기 위한 인프라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국어 안내 시스템과 외국인 친화 콘텐츠 개발, 전문 관광 해설사 운영은 물론 고성 DMZ박물관과 양양 낙산사 등 동해 북부권을 연계한 광역 관광 상품도 함께 개발 중이다.

‘워케이션’과 ‘런케이션’ 같은 체류형 콘텐츠 발굴에도 앞장서며 ‘머무는 여행’의 가치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250개 기업, 약 2만 명이 속초 워케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또 속초해수욕장 백사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전국 최대 규모의 미디어아트 ‘빛의 바다 속초’ 등 야간 볼거리까지 더하며 도시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사계절 내내 활기를 띠는 속초관광수산시장 같은 감성 콘텐츠 역시 관광객들에게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머물 이유’를 제공한다.

박경진 속초시 관광전략팀장은 “크루즈 관광이 시작점이었다면 체류와 확산, 재방문으로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관광 도시 모델을 완성해 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2027년에는 서울과 속초를 연결하는 동서고속화철도도 개통될 예정이다. 이 철도로 서울 용산에서 속초까지의 이동 시간은 99분으로 단축된다. 철도와 항만, 내륙과 해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국내 유일의 관광 복합 거점 도시로 도약할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병선 속초시장은 “속초는 크루즈에서 내리자마자 도시 전체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도시”라며 “콤팩트 시티 전략과 크루즈 관광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속초를 동북아를 대표하는 국제 해양 관광 거점 도시로 도약시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