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계산하면 딱 50 대 50이 아닐까?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는 직장생활에서부터 열정을 발했고 이어서 전개되는 아내와 며느리의 자리, 엄마의 자리, 교사의 자리. 모두 남들만큼은, 보통 사람들만큼은 할 수 있으리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내가 얼마나 자만했는지 살면서 깨닫는 것이 인생이었다. 내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삶이라는걸.
40년도 다 되어 가는 뚜렷한 기억 한 토막. 첫 딸이 생후 3일째 되는 날, 우유를 먹다 사레에 걸렸고 산소 부족으로 뇌의 운동세포가 손상되어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오른쪽 팔다리에 힘이 없어 균형감각을 잃은 아이는 세 살이 넘도록 혼자서 걷지 못하여 퇴근하면 아이의 뒤에서 두 손을 잡고 온 동네를 걷는 게 내 일과였었다. 죽기 살기로 아이를 걸리는데 매달린 나에게 불면증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평생을 덮쳤다.
아이는 걸으면서 간판을 읽으며 한글을 떼더니 곧 동생을 낳게 된 만삭의 엄마에게 한마디 했다. ‘엄마, 나 한 번 걸어 볼까?’ 하더니 거짓말처럼 한 걸음을 떼고는 바로 온 마루를 성큼성큼 걷는다. 주택에서 언니네와 열 식구와 한 가족을 일구며 살던 당시. 온 가족이 놀라서 환호했고 ‘할렐루야’ 내 귀에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크게 울려 퍼졌다. ‘너 왜 이렇게 걸을 수 있으면서 엄마 애를 태웠냐?’ 물었더니 ‘자신이 없어서’ 란다. 운동신경을 다친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걸으며 조금씩 걸음에 대한 자신감을 쌓아 갔던 것이다. 영리한 아이는 곧 동생이 태어나면 걸어야겠다는 나름의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딸아이는 언제 못 걸었냐는 듯 혼자서 온 동네를 걸어 다녔고 동생을 보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오른쪽으로 균형감각이 없어 큰 운동은 무리였고 발음에도 문제가 여전했지만 나는 일단 안도했고 무식했던 나는 앞으로 계속 좋아질 거라는 주치의의 말씀에만 믿음을 가져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것으로 우리 모두 정상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한 것이다.
불과 2,30년 전 아이에게 알맞은 교육기관은 아예 없었고 균형감각이 부족한 아이가 초중고를 일반학교를 다녔으니 옆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겠는가.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아이의 장애를 사회적 도움의 대상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이와 우리 가족이 짊어지고 가야 할 몫으로 생각하여 연말 정산에서 장애인 자녀 혜택은 한 번도 신청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서울로 대학을 떠났고 불편한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해서 지금도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우리집에서 먼 광주라는 타지에서.
나는 지금도 아이가 혼자 걷게 되면서 더 이상 운동에 매달리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초등학교 때는 그나마 산에도 따라다녔고 나름 신체활동의 기회가 많아서 장애가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던 것이 중고등학교 생활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하면서 신체활동이 점점 줄어 들었고 따라서 다리의 근육도 소멸되고 있었으리라.
상경한 대학생활에서 아이는 어느 날 학교에서 기숙사까지 걷는 길이 멀게만 느껴지더니 거대한 광장에서 한 발짝도 못 떼는 자신이 보였다고 말했다.
공부, 취업.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힘든 시간을 간과해 버렸는지 지금도 내 후회는 마음 깊이 남아 혼자 보행이 어려워진 아이의 모습에서 절망을 느낀다. 차라리 공부를 시키지 말고 뛰놀게만 할 것을. 운동만 죽도록 시킬 것을.
사실 아이가 내 품을 떠나 서울로 대학을 가고 없었던 그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웠다. 아이 스스로 택한 대학이었고 나는 그 선택을 축하하며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로 내 불면증도 조금은 나은 듯했다.
나는 학교에서 만난 내 학급의 아이들을 사랑했고 편애하지 않았고 병가나 연가를 개인사정으로 쓰지 않았으며, 내 세 아이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한 번도 참석치 않고 아빠나 이모가 대신 참석하게 한 구 시대의 나름 반듯한 공무원이었다. 그게 최선인 줄 알았으니까.
나는 감사하게도 91년에 셋째 아이를 낳아 우리나라 처음으로 시행하는 육아휴직 3년의 혜택을 본 1세대였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세상에서 셋째를 가져 사회에 대단히 미안한 마음으로 옆 반 샘께도 알리지 않았다. 그 해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교실과 교무실 서랍까지 깨끗이 정리하며 3년 휴직에 들어가는 사람으로서의 정리를 꼼꼼히 하는 나에게 옆 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안 선생은 뭘 그리 깨끗이 치우냐. 다시는 안 나올 사람처럼’ 그때의 사회에서 내 욕심으로 셋째를 가진 나는 비난의 대상이라는 마음이었다.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정치와 사회 구조는 금방 바뀌어 그 아들이 서른 살이 된 지금 인구 감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작금의 세상은 너무 뜻밖이다. 셋째를 가져 미안했던 나는 어느새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것이 이 녀석을 낳은 것이 되었다. 녀석은 늙어가는 부모에게 든든한 젊은 친구이고 두 누나에게도 듬직한 동생이며 세상에서 셋째아라고 혜택을 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도 모른다. 두 개의 길이 있으니 나는 다만 지금 택한 길로만 가고 있을 뿐. 첫아이가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망에 깊이 빠졌을 때도 나는 언제나 산을 찾아 위안을 받았다.
봄 산은 초록이 시작되는 첫걸음. 옅은 연둣빛으로 산은 준비를 한다. 진달래 군락을 만나고 덜꿩, 올괴불, 분꽃들의 꽃봉오리를 만나 산길을 오르며 내뱉는 호흡마저도 잎새 빛에 물들까 싶은 마음으로 가쁜 숨을 천천히 나지막이 내쉬며 걷는다. 그 연한 봄 산이 짙어진 성숙의 여름 산에는 온통 싱싱한 산소를 뿜으며 온몸을 적셔 주는 아름드리나무, 층층나무도 좋았고 노각나무 너는 귀족처럼 멋진 수피의 무늬를 보이며 나를 설레게 했다.
푸른 과실이 햇빛을 마시고 제 속의 쓰고 신 물을 달고 향기로운 즙으로 만드는 가을은 산을 타고 급속히 내려오더니 지금은 도심 가로수까지 빛나게 눈부신 풍경으로 길을 멈추게 한다. 노란 은행나무는 길바닥을 덮고 벚나무 붉은 잎은 나의 책갈피에 자리 잡기도 한다.
가을이면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인간에게 베푼다는 생각 없이 내리쬐어 곡식을 익히고 과일을 열매 맺게 한 이는 대지인가 빗물인가 햇빛인가. 비는 인간에게 베푼다는 생각 없이 마른 대지를 적시며 강을 이루고 바다를 완성한다. 이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남을 위해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색을 낸다.
정년을 몇 년이나 앞두고 명예퇴직을 한 나는 더욱 산에 빠졌다. 현직에서는 주말에만 찾았던 산을 이제는 일상이 산사람으로 되었다. 숲해설가 공부를 하여 산에서 걸으면서 보이는 모든 나무와 풀들의 이름을 불러주게 되었고, 문화해설사 공부를 한 뒤에는 유적지의 바윗돌에 새겨진 조각에서 석공에 베이고 무뎌진 상처투성이 손이 보이고, 비가 내려 차분해진 산사 고찰을 살펴보며 우리 땅에서 살다간 많은 이들이 이곳 부처님께 신심을 다해 공양하고 의지하며 평생을 보내었구나. 마음 한구석 그분을 모시며 고단한 삶에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기도하였구나. 그 세월이 보인다.
내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 장애인 자리에 세워진 승용차를 타고 왼발로 악셀을 밟고 왼손으로 핸들을 돌리면서 운전하여 회사의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하여 역시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벽을 잡고 사무실에 들어가 전산 작업 일을 한다. 내게 한 번도 말하진 않지만 그 여리고 고운 성품에 동료들의 도움이 부담도 되고 고마움도 클 것이다.
아이가 한 번은 그랬다. ‘어머니, 저는 한 번도 주위 사람들이 저를 무시하거나 못되게 구는 것을 겪은 적이 없어요. 도움을 많이 받아서 미안할 뿐이죠’ 그 말이 얼마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던지. 이후 나는 조금씩 내 눈에 보이는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계단이 힘든 어르신에게 내 한 팔의 힘을, 넘어진 장애인에겐 망설임 없이 다가가 손을 내민다. 내가 어려운 이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누군가가 우리 아이의 손을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과 같이.
지금은 수목원에서 포레스트 가이드로 일하며 주로 어린이집 유아들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숲 수업을 하는데 장애인은 바로 내 아이 같아서 따뜻한 한마디를 더 건넨다. 과일을 익게 한 햇살처럼 생색 내지 않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나를 인도하소서.
지난달 가을 빛으로 물든 산을 혼자 오르면서 벅차고 감동적인 장면을 바라보며 산에 오르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미안하여 갑자기 떠오른 궁리가 자전거였다. 자전거는 승용차보다 더욱 가깝게 나무를 보고 풀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자 자전거에 보조 바퀴를 달면 균형감과는 상관없이 달릴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고 부리나케 동생 둘이 광주로 달려가 자전거를 사고 보조바퀴를 달아 하루 종일 연습했더니 오르막에서는 낑낑대지만 공원의 자전거길은 제법 잘 달린다면서 사진을 찍어 보내온다. 다음 주말은 우리 부부가 달려가 온 하루를 황룡강 수변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데 씽씽 잘 달린다. 사십이 된 딸아이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를 탄다는 사실에 나는 눈물겹도록 감사했다. 얘야, 이 가을의 공기를 흠뻑 마시며 자유롭게 다녀보렴. 더욱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날아 보렴.
늦가을 산지기들과 동행하면서 우리의 얘기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내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게 하소서. 함께 물을 건너고, 함께 산을 오르는 동행을 하게 하소서. 인생에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계산하지 않고 살게 하소서. 그래서 아름다운 동행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