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유명 배우가 쓴 책 제목이다. 나는 오늘 걷는 사람이 되었다.
오십 중반에게 늦가을은 스산한 바람이 마음을 헤집는 때다. 사방에 뒹구는 낙엽만큼이나 머릿 속도 이런저런 상념들이 뒤엉켜 어지럽다. 30년 열정을 쏟아붓던 직장을 떠났으니 안 좋은 것들이 겹치고 쌓였다. 가라앉기 십상인 나이, 날씨, 상황이다.
걷기대회는 이런 때 찾아왔다. 한 번 처지기 시작한 우울한 마음은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동네에서 내키는 대로 내 맘대로 걸으면 커피 한 잔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사탕발림 같은 홍보 전략이 밉지가 않다. 가을 정취, 동네 탐방, 역사 문화 유적 같은 있어 보이는 단어와 가족과 동행한다는 의미까지 실으니 ‘그래, 까짓것’ 한 번 나서보자 싶다.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아내마저도 덩달아 걷게 하는 힘. 공짜에는 그런 마력이 있다.
아내와 함께 걷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집 나서 길 하나 건너면 공원이 있고, 공원 끝자락에서는 수로를 따라 산책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걷기에 이런 좋은 환경이 근처에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평소에 잘 모르고 있던 동네의 재발견이다. 김포는 신도시 개발로 아파트가 우후죽순 자리 잡았지만 5천 년 쌀농사 역사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논으로 이루어진 평야가 펼쳐져 있고 바둑무늬의 반듯한 농로와 뱀처럼 구불구불한 수로가 그 사이를 혈관처럼 잇고 있다.
비 온 직후에는 누런 흙탕물이거나 여름철에는 시커먼 색깔을 띠고 있어 별로 친근한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수로에는 오리와 백로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쭉 뻗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다가 웅크리고 있던 길고 하얀 목을 순식간에 튕겨내며 물속으로 기다란 부리를 처박아 대는 걸 보면 물고기가 꽤나 있는 모양이다. 오리들은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첨벙첨벙 물속으로 잠수했다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도시 개발로 온통 콘크리트 건물이 빽빽하고 포장도로에는 자동차들로 미어터질 지경인데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모습이 그 속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고, 그것도 집에서 몇 걸음 나서면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놀랍고 반갑다. 인간이 몰아가는 초고속 개발 열기 속에서도 너희들이 부디 오래오래 동행할 수 있기를. 괜히 미안하고 안쓰러운 인사를 마음속으로 건네본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휑하니 비어있지만 추운 겨울 눈보라 속에서 땅심을 단련하며 새 봄의 생명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발걸음은 우저서원으로 향한다. 잘 정비된 농로 덕분에 번잡한 찻길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도착할 수 있다.
조헌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가난함 속에서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글공부를 위해 멀리 있는 스승의 집으로 향했다. 인천 불로동으로 넘어가는 언덕 이름이 여우재인데, 그 당시 여우가 자주 출몰했을 것이고 요사스러운 여우와 벌인 소년 조헌의 한 판 무용담은 위인전에 남아 이 지역 꼬마들의 자랑과 동경이 되고 있다. 강직한 성품의 그는 왕이 싫어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죽을 각오가 아니면 못한다는 도끼를 지고 상소를 올리는 지부상소로 몇 번이나 왕의 눈밖에 나기도 했다.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는 학자의 삶을 살고 있던 중 전쟁이 터지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의병을 일으키고, 청주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금산전투에서 700명 의병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사후에 영의정에까지 오르고 서원도 왕의 인정을 받아 우저라는 오늘의 이름을 받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오늘 서원을 찾는 마을 후손을 맞이하고 있다. 평소에 떠올리지 않았던 우리 고장의 영웅을 다시 돌아보며 밥벌이와 삶의 고단함 속에 묻혀있던 무엇이 속에서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논 한가운데 홀로 자리하고 있는 전통찻집에 들렀다. 오랜만에 걷기 운동으로 피로해진 다리를 쉬며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앉아 있는 시간이 늦가을에 어울리는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 멀지 않게 보이는 높다란 수직의 아파트 건물과 바로 이어지는 논밭의 수평 들판이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지고, 논 한가운데 자리한 찻집도 마당 한가득 건강 음식을 숙성시키느라 늘어서 있는 장독들이 주는 풍경도 친근하고 여유롭기만 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을 오후의 햇살은 봄볕만큼이나 따사롭게 내리쬔다. 걷기가 주는 운동효과는 겉옷을 벗게 만든다. 마음마저 훈훈한 것은 따뜻한 차를 마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길게 드리운 두 그림자가 정겨워 카메라에 담아본다.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성찰도 여유도 거기서 나온다. 평소 가까이 있는 것들을 재발견하고 감사하고 좀 더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걷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함께 한 아내가, 철새가, 논길이, 그리고 잠들어 있는 조상이 새롭게 다가온 가을이었다.
이참에 매일 걸어볼까 싶다. 내일도 나는 걷는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