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운명이 엇갈린 부자(父子)가 있습니다. 우범선은 조선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기세 좋게 활동하다가 명성왕후 시해 사건의 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나라의 역적’이 되었고, 그의 아들 우장춘은 1950년대 세계 최빈국 한국의 밥상을 업그레이드해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조선멤버십 인기 시리즈 ‘유석재의 악인전’이 일본과 을미사변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인물, 우범선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우범선(禹範善·1857~1903)은 충청도 단양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876년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고, 김옥균 등과 교류하며 개화파의 일원이 됐습니다. 근대화를 흠모하던 그는 신식 군대 별기군(別技軍) 참령관, 훈련원 첨정 등 무관직을 수행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척족들은 그를 평안도 순천으로 유배 보냅니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이듬해 4월 우범선은 훈련대(訓練隊) 제2대대장으로 발탁됩니다. 그 사이 조정은 친러 세력이 장악했는데, 그해 9월 새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위축된 세력을 만회하고 자파 세력을 부식하는데 최대 장애가 되는 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바로 왕비(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됨)입니다.

우범선은 미우라의 을미사변에 가담하기로 합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훈련대와 순검이 충돌해 난투가 벌어지는 일이 잦았고, 고종과 왕비는 훈련대를 해산하려 했습니다. 해산 위기에 직면한 훈련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비를 시해한 것처럼 꾸미려는 것이 일본측 계획이었습니다. 우범선은 여기서부터 분명 어긋나고 잘못된 길을 걸었습니다.

10월8일 새벽 우범선은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긴 칼을 찬 일본 낭인이 시해를 저지르는 동안 우범선 부대는 그들을 좌익 후면에서 엄호했습니다. 낭인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산에서 불태웠는데, 우범선은 부하 윤석우에게 지시해 그 유해를 땅속에 묻도록 했습니다.

‘시해 주범은 조선인 우범선’. 이날 사건 이후 그의 이름에 주홍글씨가 새겨집니다. 을미사변 비사(秘史)와 우범선의 말로, 그의 사후 벌어진 거대한 반전이 본편에 자세히 담겨있습니다. 조선멤버십에 가입하면 ‘유석재의 악인전’ 시리즈를 모두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