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오래도록 회자되는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살생부’ ‘압구정’이란 어휘는 오늘날까지 휘발되지 않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 최근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등장하면서 뭇사람으로부터 더없는 ‘악인’으로 지목되는 한명회. 계유정난을 ‘성공한 쿠데타’로 기획한 그는 살아서 사적 욕망을 마음껏 누렸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걷는 말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조선멤버십 인기 시리즈 ‘유석재의 악인전’이 그의 일대기를 낱낱이 파헤칩니다.

한명회는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7대조 한강부터 증조부 한수까지 모두 ‘고려사’ 열전에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종조부인 한상경은 조선 왕조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원래부터 그는 ‘금수저’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학문에는 큰 재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명회는 37세에 이르러서야 음서(蔭敍)로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인 경덕궁의 관리직을 맡습니다. ‘궁지기’ 한명회와 수양대군의 만남은 이곳에서 시작됐지요.

1453년, 한명회는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를 기획합니다. 그가 ‘제거해야 할 정적 리스트’를 적은 제목에서 ‘살생부(殺生簿)’라는 어휘가 처음 생겨났습니다. 이후 계속 승진합니다. 도승지,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나아가 8대 임금 예종과 9대 임금 성종의 장인까지 됐습니다. 두 임금의 장인이 한 사람인 경우는 조선 왕조에서 한명회가 유일합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압구정(狎鷗亭) 사건’으로 권세의 정점에서 내려온 한명회는 사후 부관참시되는 운명을 겪습니다. 생전에 한명회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처럼 자신의 일생을 미화하는 시를 쓴 적이 있는데, 매월당 김시습은 이를 듣고 글자 두 자를 바꿔버렸다고 합니다.

한명회의 일생을 자세히 보고 싶다면 조선멤버십 가입하고 ‘유석재의 악인전’ 본편에서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