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풍스러운 옛것과 생기 넘치는 현재가 공존하는 곳, 대만은 세련된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오랜 전통이 묻어나는 골목이 나란히 존재하는 여행지다. 수도 타이베이(台北)의 세련된 도시 풍경도 좋지만, 대만의 진짜 얼굴은 조금 더 동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드러난다. 도시의 속도를 벗어나 자연과 시간, 그리고 사람의 삶이 천천히 흐르는 특별한 대만을 만나게 된다.
타이베이 남동쪽 120㎞ 거리에 자연의 장엄함과 소박한 일상이 어우러진 도시가 있다. 화련(花蓮)이다. 타이베이에서 기차로 2시간 30분이 걸리는 곳으로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지리적 제약과 보존 정책 덕분에 압도적인 자연 풍경, 다채로운 원주민 문화, 도시화되지 않은 여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최근엔 젊은 창작자와 감각적인 로컬 브랜드가 이곳에 터를 잡으며 도시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짧은 여정 안에 대만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면 화련은 더없이 매력적인 선택지다.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를 벗어나 동부 해안을 따라 달리다 보면 깎아지른 듯한 높은 산들과 광활한 대양이 눈을 사로잡는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된다. 동쪽은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중앙산맥(中央山脈)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데 그렇게 매혹적인 자연 경관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화련에 도착한다.
■ 치싱탄 해변
화련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6km 떨어진 치싱탄(七星潭) 해변은 화련의 대표 명소로 에메랄드빛 태평양과 매끈한 자갈이 어우러진 자연이 그려낸 시(詩) 같은 공간이다. 치싱탄의 여러 유래 중 하나는 북두칠성이 잘 보이는 곳이라는 뜻인데 단층으로 형성된 해협과 활모양으로 굽어진 해안이 초승달 같이 보인다고 하여 월야만(月牙灣)이라고도 불린다. 약 15km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 넓은 잔디밭과 야자수가 어우러져 이국적인 휴양지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눈부신 바다와 매끈한 자갈이 부딪히는 파도 소리는 여행자의 마음을 천천히 적신다. 저 멀리 보이는 해안 절벽까지 더해지면 눈앞의 풍경이 마치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느껴진다. 숭고한 자연과 고요한 여유, 해안 예술 감성이 어우러진 아득하고 신비로운 풍경이다.
■ 장군부 1936
한국과 대만은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 강제 지배를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근대 건축물이 전쟁과 철거로 상당수 사라진 한국과 달리 대만은 주요 건축물을 보존하고 있다. 장군부 1936(이하 장군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 주둔 일본군 고위 장교의 관저로 사용된 곳이다. 1936년 건축된 8채의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메인 장군 관저는 현 지정 고적(縣定古蹟), 나머지 7채는 역사 건축물로 분류되어 있다. 2020년부터 역사 현장 재생 프로젝트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2024년 4월 재개방됐다.
살아 있는 역사 공간으로 재해석된 장군부를 걷다 보면 일본식 목조 가옥 특유의 정갈함 때문인지 교토의 한적한 골목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기모노 체험관, 로컬 레스토랑, 카페 등 문화와 미식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곳은 과거를 품은 현재의 미학을 보여준다. 메이룬 강변 산책로, 송원별관, 정화교 등 유명 관광지와도 인접해 있다.
■ 문화창의산업단지
화련 시내 중심에 있는 문화창의산업단지는 100년 가까이 된 옛 양조장 건물을 재해석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1988년까지 와인과 미주(米酒)를 생산하는 국가 지정 공장으로 운영됐으나 이후 방치되었고 2006년 시작된 복원 작업 이후 2012년 개방되면서 지역 문화의 심장으로 탈바꿈했다. 26동의 옛 창고 건물이 남아 있으며 현재는 전시관, 공연장, 공방, 로컬 마켓, 카페 등으로 재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오래된 공간이 품은 시간의 무게와 현재의 창작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일본식 벽돌 건물과 방공호 등 근대 산업 건축의 흔적 위에 현대적인 예술 콘텐츠를 더해 지역 문화 재생의 대표 사례가 됐다. 예술과 지역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이곳의 풍경을 보니 더 깊은 대만을 만난 듯하다. 주말마다 수공예 플리마켓과 지역 아티스트의 버스킹, 창작 워크숍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