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삼성전자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김현국

세계 2대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냉전 후 첫 전쟁에 돌입했다. 이번 전쟁은 전투기나 총이 등장하진 않는, 무역 전쟁이다. 21세기 패권을 놓고 벌이는 총성 없는 미·중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는 반도체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다. 정보기술(IT)과 4차 산업혁명으로 정의되는 미래를 압도하기 위해선 그 핵심 ‘두뇌’인 반도체 분야를 장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양국 모두 필사적이다.

반도체 전쟁은 지난 10년, 화웨이로 상징되는 중국 IT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자 미국이 그 ‘급소’인 반도체를 강타하면서 발발했다. 미국은 자국 회사가 반도체 관련 부품을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막았고, 미 회사가 아니더라도 미국의 기술을 쓴다면 반도체를 중국에 팔지 말라고 5월 ‘명령’했다. 지난 17일엔 마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화웨이의 반도체 우회 수입까지 완전히 차단해 중국 공산당에 직격탄을 날렸다”고 맹공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의 확전은 한국도 본격적으로 휘말려 들게 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첨단 반도체 위탁생산을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대만 둘뿐이다.(이런 반도체 위탁생산 회사를 파운드리

30일 가동에 들어간 삼성전자의 평택 반도체공장 2라인의 모습.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이다.

모든 전쟁은 지정학을 뒤흔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을 계기로 한국의 반도체 맹주 삼성전자와 대만의 세계 1등 파운드리 TSMC는 미래 반도체 시장을 지배하려는 전략과 기술 싸움을 벌이고 있다. Mint는 세계 반도체 전문가 10명을 긴급 인터뷰해 총성 없이도 격렬한 반도체 전쟁의 전세(戰勢) 분석을 의뢰했다.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전 정보통신부 장관·현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CEO) 등 글로벌 반도체 회사의 전·현직 경영진, 김정호 카이스트 교수와 에드윈 칸 코넬대 교수 등 한국·미국·대만 등 주요국의 학계 전문가를 인터뷰했다. 반도체와 관련한 돈의 흐름을 추적하는 투자자들도 만났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목소리는 때로 엇갈렸지만 공명(共鳴)하는 의견이 있었다. ‘반도체 전쟁은 결국 파운드리 대전(大戰)이며, 한국과 대만이 쟁패를 벌일 것이다. 지금으로선 TSMC가 우세하다.’ 한국의 삼성전자가 이 판을 뒤집기 위해선 AI 반도체 등 미래의 최첨단 반도체를 노리는 기습 작전이 필요하단 얘기였다. 이런 흐름 속에 30일 삼성전자는 경기도 평택에서 파운드리로도 활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종합 반도체 공장 가동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대전의 승패는 어떻게 갈릴까. Mint가 만난 반도체 전문가 10인의 이야기를 종합한, 2020년 ‘반도체 병법’을 소개한다.

그래픽=김성규


◇제1합: 대만, 중국에 등을 돌리다

중국은 IT 강국으로 빠르게 성장 중이다. 그런데 치명적 약점이 있다. 첨단 반도체를 만들지 못한다. 다른 나라가 만든 것을 사다 쓴다. 미 반도체 회사 '실리콘랩스'의 알레산드로 피오바카리 CTO(최고기술책임자)는 "중국은 세계 반도체의 53%를 사가지만,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양은 12% 정도에 불과하다. 대만·한국·일본 등 반도체 생산국으로부터 중국이 독립하려면 아직 한참 먼 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지으려면 막대한 돈과 기술력, 모두가 필요하다. 저우즈핑 베이징대 전기공학부 교수도 뒤처지는 반도체 생산 능력이 중국의 '급소'라고 했다. "중국이 반도체 설계 자체는 곧잘 합니다. 하지만 대만·한국의 생산 능력을 따라잡으려면 적어도 5~10년은 걸릴 겁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이 중국 반도체 공급망을 차단하자, 세계의 시선은 대만 파운드리 TSMC로 향했다. TSMC가 중국에 반도체를 팔아버리면 미국의 일격은 힘을 잃게 된다. 지난해 TSMC 전체 매출의 14%가 화웨이에서 나왔기 때문에 TSMC가 쉽게 중국을 내치지 못하리라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대만은 중국을 버리고 미국을 선택했다. 화웨이와 거래 중단을 선언(7월)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애리조나에 첨단 공장을 짓겠다고도 했다. 정치·외교적 판단에 따른 국가 전략 차원이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보안 문제로 익명을 요구한 한 글로벌 반도체 회사 전직 CEO A씨의 이야기다. "미국의 목적은 화웨이부터 무너뜨리자는 것이다. 화웨이에 반도체를 가장 많이 공급해온 대만이 미국을 선택했으니 다 잡았다고 보면 된다. 중국 목줄을 미국이 제대로 쥐었다." 미국이 화웨이가 고사(枯死)할 때까지 이런 제재를 유지하리라고 보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와이 낫?(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래픽=김성규

◇제2합: 삼성 vs TSMC, 반도체 수주전

첨단 반도체를 위탁 생산할 수 있는 파운드리는 TSMC와 삼성전자 둘뿐이다. 기업 전체 매출은 TSMC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삼성전자가 크지만, 파운드리만 놓고 보면 TSMC가 앞선다. TSMC에 반도체 위탁 생산을 맡기는 회사가 많다는 뜻이다. Mint가 인터뷰한 전문가 대부분은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의 우세를 삼성이 조만간 뒤집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전망했다. 지난 30년에 걸쳐 TSMC가 '고객사'들과 쌓아온 신뢰가 워낙 견고하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한국·대만 파운드리 전쟁의 1차 성적은 '대만 우세'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전망에 따르면, 올 3분기 세계 파운드리 점유율은 TSMC가 53.9%. 원래도 1위였지만 전년 동기보다도 2.4%포인트 올랐다.(삼성 점유율은 17.4%다.) A씨의 설명이다. "TSMC는 30년 이상을 위탁 생산만 했다. 오랜 친구가 많은 거다. (고객사 입장에선) 의리를 지켜온 '절친'을 두고 왜 다른 친구를 만나겠나. 그걸 깨려면 기술적으로 지금보다 압도적으로 앞서가는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던 진대제 전 장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삼성은 반도체 위탁 생산을 하지만 스마트폰 등 자체 생산하는 제품도 있다. 애플 같은 회사가 AP(스마트폰 핵심 반도체)를 삼성에 맡기기 껄끄러울 수 있다. TSMC는 자기 제품이 없으니 오히려 편하고…."

그래픽=김성규

◇제3합: 삼성 vs TSMC, 기술 전쟁

파운드리로서 삼성의 걸림돌은 다른 IT 회사들의 견제다. 스마트폰 등 자사 제품에도 반도체를 넣기 때문에 생산을 의뢰하려는 회사는 기술 유출을 우려한다. 지난 몇 주 사이 Mint가 인터뷰한 전문가들은 "그래도 기술력에선 삼성전자가 앞서갈 것"이라고 했다. 반도체 생산 기술은 흔히 '나노(나노미터·㎚)'로 표시하는데 숫자가 작을수록 기술력이 좋다.(간단히 말해 같은 성능을 지닌 반도체를 더 작게 만들 수 있단 뜻이다.) 실리콘랩스 피오바카리 CTO는 "삼성과 TSMC 중 3나노를 누가 빨리 내느냐, 이 싸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 25일 TSMC가 폭탄 발표를 했다. 세계 최초로, 2024년 2나노 반도체 생산을 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2024년 전후에 생산하고, 공장은 TSMC 본사가 있는 대만 신주에 짓는다. 20조원을 투자한다. 추후 제품을 사주기로 한 미국의 거대 수요처가 물밑 지원 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삼성전자는 올해 가을 5나노를 생산할 예정. 일단 TSMC에 선수를 빼앗겼다. 대만 트렌드포스의 정관웨이 애널리스트는 27일 "TSMC가 파운드리 1위를 공고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에드윈 칸 코넬대 교수도 "2나노는 매우 큰 리스크와 자본 투자를 요한다"면서도 "TSMC의 공격적인 전략은 파운드리 업계의 리더가 누구인지 보여준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2나노가 반도체 기술력 경쟁의 마지막 단계라고 일단은 본다. 저우즈핑 베이징대 교수는 "2나노 이하로 기술력을 끌어올리기는 극도로 어려울 것이다. 최종 '일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전쟁에서 패배한 걸까.

◇제4합: AI 반도체라는 새 전장

승부는 아직 모른다. 반도체 경쟁은 파운드리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진행 중이다. 반도체는 크게 둘로 나뉜다. 메모리와 시스템이다. 뇌에 빗대 말하면 메모리 반도체는 '기억하는 능력'을, 시스템은 '머리가 돌아가는 능력'을 맡는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압도적인 세계 1위다. 파운드리는 메모리가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위탁 생산을 가리킨다. 메모리 반도체는 워낙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서 삼성전자를 따라올 경쟁자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클라크 쳉 국제반도체장비협회 선임연구원은 "지금 반도체 시장은 각 나라가 가장 잘하는 분야를 나눠 가진 양상이다. 미국은 반도체 디자인, 일본은 소재, 대만은 파운드리, 한국은 메모리…. 이 구도가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문 한 가지. '삼성은 왜 파운드리에 도전장을 내고 TSMC를 이기려 할까.' 반도체 설계 기술을 더 개발하는 쪽으로 경쟁력을 강화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래의 고부가가치 반도체로 꼽히는 AI 반도체에서 찾는 전문가가 많았다. 김정호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는 "미래는 AI 반도체 시장이 크게 열릴 것이다. 삼성이 메모리 1등, 파운드리 2등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이 둘을 결합해 독보적인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로 도약하느냐의 승패는 AI 반도체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올해 121억달러 규모인 AI 반도체 시장이 2023년 343억달러로 크게 성장하리라고 전망한다.
다수의 전문가는 '삼성은 삼성만의 장점을 살려 승부를 봐야 한다'고 했다. TSMC는 파운드리 1등이지만 메모리 반도체나 설계 능력은 '제로'다. 삼성은 AI 반도체를 만들려면 꼭 필요한 이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A씨는 "나노 경쟁은 조만간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은 누가 다양한 반도체를 한곳에서 잘 조립할 수 있는지의 승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자동차 엔진 성능이 다 같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차체를 가볍게 만드는 쪽이 속도가 더 잘 날 수밖에 없다. AI 반도체도 결국 메모리·AP 등을 한곳에서 얼마나 잘 쌓고 조립하느냐의 승부일 것이다. 이걸 전부 할 수 있는 유일한 회사는 삼성전자다."